▲안정효 번역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문학사상사
쿤타는 누워 있는 어린 아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거의 쿤타만큼 검고, 모습도 분명 만딩카족이었다. 그는 거대한 강물처럼 몇 세기 동안 내려온 킨테 집안의 혈통이 여전히 또 하나의 대를 잇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자랑스럽고 흐뭇했다. 쿤타는 어떤 위험이 따를지라도 자기 아이는 토우봅 사람들의 이름을 갖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자기 방식대로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생각했다.
쿤타는 그의 혈관 속에서 아프리카적인 것이 고동치고 있음─자신으로부터 그의 분신인 아기에게 흘러가는 것─을 느끼면서 발길을 멈추고 담요 한 귀퉁이를 벗겼다. 그리고 조그맣고 까만 아기의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만딩카 어로 크게 "보라, 너보다 위대한 유일한 것을!"하고 외쳤다.
- 안정효 번역 <뿌리>(문학사상사) '잊을 수 없는 낙원, 아프리카' 몇 토막
요즈음 서점가에 나가 보면 '책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책을 만든다'는 글이 붙어 있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이 말은 곧 스스로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체험, 즉 글쓴이가 직접 겪은 체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간접체험을 겪게 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한다는 그런 뜻일 게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을 벗어나 살 수가 없다. 이는 이 세상이 싫어 홀로 절간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나름대로 수도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절간이나 기도원에서 마음을 닦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둘러싼 새로운 환경이 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직ㆍ간접적인 경험을 겪게 된다. 그 중 가장 좋은 경험은 스스로 직접 겪음으로써 그 어떤 새로운 사실을 몸과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주변 환경을 벗어난 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은 스스로 직접 겪고 싶어도 겪을 수가 없다. 그러한 간접 경험들은 그 사실을 겪은 이들에게 직접 듣거나 아니면 구전(口傳)을 듣거나 아니면 그러한 사실을 꼼꼼하게 기록한 책을 읽음으로써 간접 경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릴 때 집안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 교과서 밖 책들은 많이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에는 수업이 끝나면 학교 도서관에 가서 <어린왕자>나 <이솝우화> <한국전래동화> 따위 책을 자주 읽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고교 입시에 따른 수험공부로 다른 책들은 아예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고교에 입학하고 나자 나도 모르게 화가보다도 시인이나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큰형이 사다 놓은 그 두꺼운 세계문학전집 30권짜리도 나뭇잎 갈피를 넣어가며 꼼꼼하게 다 읽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시나 수필을 쓰고 소설 비슷한 것도 여러 편 썼다.
근데 내가 쓴 글은 이상하게 흐느적거렸다. 마치 뼈 없는 해파리처럼. 무언가 머릿속에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그 희미한 무언가가 좀처럼 잡이지 않았다. 내가 쓰는 글들은 모두 내가 한 번도 겪지 못한 일들, 그저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그런 일들, 말 그대로 허공에 떠도는 뜬구름을 잡는 식의 그런 이 빠진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가 고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던가.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한일합섬에 취직을 한 이웃집 누이가 "오빠, 이 책 한번 읽어 볼래" 하며 내게 꽤 두꺼운 책을 한 권 내밀었다. 그 책이 바로 열여덟 해 동안 살았던 나의 사고를 통째로 뒤바꾸어 준, 미국의 흑인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였다.
하지만 처음 그 책을 받아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톨스토이나 헤밍웨이 같은 그런 이름들만 알고 있었고 알렉스 헤일리라는 작가의 이름은 생전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새로운 책에 목말라 있었던 나는 그날부터 심심풀이 땅콩처럼 그 책을 무심코 읽기 시작했다.
<뿌리>의 주인공은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7대조이기도 한 쿤타킨테였다. 그러니까 그 책은 소설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실제 있었던 이야기, 즉 알렉스 헤일리 집안의 7대조에 걸친 일종의 족보였다.
<뿌리>의 첫 머리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캄비아란 마을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자신들의 풍속을 지키고 가꾸며 평화롭게 살고 있던 주인공 쿤타킨테에서 시작된다. 그날 쿤타킨테는 여느 때처럼 북을 만들기 위해 마을 근처 숲 속에 나무를 베러 갔다가 그만 백인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고 있었던 쿤타킨테는 졸지에 자신처럼 그렇게 끌려온 140명의 흑인들과 함께 노예선 선창바닥에 갇힌다. 팬티만 걸치고 온몸이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 그렇게 아메리카로 끌려가던 흑인들은 백인들의 혹독한 매질과 굶주림에 못 이겨 거의 절반이 죽는다.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흑인의 수는 쿤타킨테를 포함해 98명뿐. 이어 쿤타킨테와 흑인들은 곧바로 노예시장에 나가 제각각 새로운 주인에게 팔려가게 된다. 새 주인을 만난 쿤타킨테는 가혹한 노동과 백인들의 철저한 인종차별에 시달리면서도 틈만 보이면 자신의 고향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몇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