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좀 있어 보이는데?'

내 인생과 가치관을 서서히 변화시킨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세 권

등록 2004.10.20 22:00수정 2004.10.2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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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살면서 사춘기는 누구나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고등학교 3년이 일종의 사춘기라면 사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춘기 시절의 조그만 추억거리 하나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짝사랑했던 아이라든지 마치 어른이 된 것인양 분위기를 잡아본 일이라든지.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유치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는 아쉽게도 짝사랑했던 그 아이가 없습니다.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를 다니며 동아리 활동 하나 하지 않던 조용한 학생이었습니다. 이성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거지요.

물론 만나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안경을 낀 데다 굉장히 뚱뚱해서 외모에 자신이 없었던 게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음악과 책이라는 너무나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음악과 책만 있다면 여자 따위 필요없다는 생각을 그때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짝사랑한 이성은 없었지만 분위기를 잡아본 적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비오는 날 슬리퍼를 신고 음악을 들으며 큰 서점에 가서 책을 읽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는 마치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날도 역시 비가 왔고 저는 슬리퍼를 신고 서점에 갔습니다. 저와 하루키는 그렇게 만났습니다. 중학교 때는 국내외 문학작품을 꽤 많이 읽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 음악에 푹 빠져 있었고 중2 때 읽은 <퇴마록>이 너무 인상적이라 그 이후에는 무협지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던 터라 하루키라는 이름은 귀동냥으로 들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a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선> ⓒ 문학과사상사

호기심에 들고 펼쳐본 문학과사상사에서 출판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걸작선>은 저에게는 굉장한 자극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단편임에도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그 당시 저에게는 '뭔가 좀 있어 보이는데?'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즉 스스로 잘 나가는 척 유식한 척 한 것에 불과했지요.

하지만 읽는 동안 무척이나 그 속에 빠져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그 문장 하나 하나에서 느껴지는 힘이 지금도 생생하니까요. 그렇게 저는 하루키를 알아 갔습니다.


두번째로 보게 된 작품이 <상실의 시대>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꽤나 여러 번 읽은 편입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대학 진학 후 첫 미팅 전에 읽었다는 것입니다.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를 나온 저로서는 미팅이 부담이 아닐 수 없었고 여자와 이야기할 때 어색해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실제 미팅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색함 속에서 만난 아이와 우연히도 사귀게 되었고 그때 또 다시 읽은 <상실의 시대>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a <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 ⓒ 문학과사상사

고3 때 처음 읽은 <상실의 시대> 이후 저는 완전히 하루키 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소설을 하나하나 독파해 나가다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두께로 굉장한 압력을 가하는 <언더그라운드>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옴진리교에서 독극물인 사린을 지하철에 살포한 사건을 르포 형식으로 담은 책이었습니다. '무슨 보고서냐?'라는 생각을 가지고 들춰본 책은 너무나 흥미로웠습니다.

신문,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는 최대한 객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목소리는 담을 수가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는 그 날 그 곳에서 사린 사건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모두 다른 인생 속에서 사린 사건이라는 공통적인 사건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줍니다. 모두 다른 성격, 배경, 사상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는지도 너무나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입니다. 이제 1년 정도된 초보 기독교인입니다. 지금도 많은 일반인들이 그렇듯이 저 역시 처음에는 개신교에 대한 좋지 못한 인상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전도를 한 사람이 여자친구였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교회에 몇 번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개신교에 대한 좋지 못한 인상이 사라졌기에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a <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 열림원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다시금 읽게된 <언더그라운드>는 또다시 새롭게 다가 왔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이 강한 개신교와 옴진리교가 행한 일을 통해 진정으로 종교가 일반인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쳐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가 일반인을 상대할 때, 사회에 일원으로서 생활할 때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쳐야 하는지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나의 조그만 행동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 보면 행동거지 하나 하나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단짝인 친구 녀석이 책상에 엎드려 음악을 듣고 있던 저에게 한 마디 말을 던졌습니다. '너를 보고 있으면 <상실의 시대> 주인공인 와타나베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저에게 이 말은 꽤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와타나베를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정말 큰 전환점이자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잘못된 형태의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는 성경과 함께 저의 신앙이 혹시라도 모를 조금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는 일종의 경고이자 메시지였습니다.

사춘기 시절 문학 소년의 단잠에 취해, 뭔가 좀 있어 보이기 위해 무작정 읽게 된 하루키의 소설은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어찌 보면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중 하나입니다. 지금 제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도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며 그 때 그 아이를 떠올리며 자신의 행동과 삶을 짚어보며 세 권의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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