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고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간첩이 되었다"

등록 2004.11.01 10:37수정 2004.11.0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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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84년부터 86년까지 보안사에서 강제근무한 재일교포 김병진(50)씨가 직접 써서 보낸 수기다. 김씨는 여기에서 83년 연세대 대학원 재학중 간첩혐의로 끌려가 2년간 보안사에서 강제근무한 뒤 일본으로 탈출해 <보안사>라는 책을 쓰게 된 경위를 서술하고 있다.... 편집자주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저는 한국 국내 대학으로 진학하려 했으나 당시 생존해 계시던 조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 가면 잡힌다,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재일한국인 간첩 서승 형제사건의 충격이 그만큼 컸었던 것입니다.

조모님 반대를 이기지 못해 저는 일단 일본 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진학하면서 동시에 재일한국학생동맹에 가입하였습니다. 재일동포 학생들 중에서도 똑똑하고 무엇보다 모국어에 능통하다는 평을 듣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재학시부터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 재일 대남 공작원 김귀웅 및 김태명(현 오사카경제법과대학교 객원교수이자 재일한국민권협 고문)이 본인이 고등학교 재학 당시에 수차례 접촉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본인에게 주체사상 운운하면서 남조선혁명을 하라고 하니까 결국 거절하고 도망친 경위가 있었습니다.

또한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재일한국청년동맹 북해도본부 간부를 자칭하는 김수일이라는 사람도 아무 면식도 없는데도 본인을 불러내어 "통혁당 강령을 수령해 주라"고 해서 제가 거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상적인 문제라기보다 저에게는 인간적 신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잘 알지도 않던 저에게 '혁명을 위해서 생명을 걸어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오만한 사람들이란 인상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재일한국학생동맹 소속인 저와 절친한 선배인 서성수에게 의논하였더니 둘이서 만나 생각해보자는 말을 듣고 수차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말끝에 선배 서성수가 북한의 대남공작에 가담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동조할 수 없는 마음과 선후배간의 정 때문에 냉정하게 대할 수 없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느껴야 했지만 결국 접촉을 거절한 바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실'에서 당한 물고문과 전기고문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재학 중이자 삼성종합연수원 일어과 강사로 재직 중이던 83년 7월 9일 토요일, 저는 보안사 서빙고분실(대공처 수사과 분실)에 불법 연행되었습니다. 연행되자마자 수사관이 법전을 제 눈앞에 내던지며 국보법을 보라고 고함질렀습니다.

이들의 예기치 않던 공갈과 그리고 처음으로 접했던 국보법의 기막힌 내용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재일동포(해외동포)와 북한 주민들은 모두 다 범죄자였던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가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혀있는 것이 국보법이었습니다. 좀더 말한다면 한국 국민들도 예외 없이 국보법 위반자들이라는 현실을 실감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기 북한 재일공작원들과 만난 적이 있으나 동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했고, 따라서 저는 간첩일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4일 동안 잠을 안 재우는 고문에서 시작하여 몽둥이로 전신을 구타하는 폭력(이 때 몽둥이를 들어 본인을 마구 친 사람은 당시 수사 2계장 김용성 육군 소령이었습니다)을 당하였습니다. 또 저는 내의까지 벗겨진 알몸상태도 끌려간 속칭 '엘리베이터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고통과 공포에 시달린 후 기진맥진한 본인이 말할 기력조차 잃어버리자 그들은 제가 상기 북한공작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공작활동을 위해서 한국으로 들어온 간첩이라는 내용의 조서를 작성해 갔습니다. 본인의 진술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그들이 저에게 요구한 대로 일본에 있는 가족들한테도 제 연행사실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서성수 선배가 입국하여 구속되면서부터 본인은 다시 서빙고분실에 연행되어 조서 작성을 강요당했습니다.

저는 선배 서성수에게 포섭되었다고 하는 고베 시내 모공원에서 '남조선혁명을 위하여 목숨 바쳐 싸우겠다'고 구두로 맹세했다고 하는 대목은 본인의 조서를 작성하던 수사관 이덕룡의 창작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으나 학원반 반장 고병천은 '그렇게 해놔야 다른 기관에서 너를 건드리지 않으니 오히려 너를 위하는 일이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만들어진 허위이며 수사관 최홍상은 '서성수도 그런 말을 너한테서 안들었다고 하더라'며 본인에게 귀띔해준 바가 있었습니다.

자장면이 싸고 맛이 있더라는 말을 했다 하여 '서울 물가시세를 탐지 수집 보고하므로써 간첩하여'라고 써내려가는 이덕룡의 조서 작성은 우습고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간첩이라는 물증으로 압수된 것은 본인의 여권과 대학원 학생증, 이 두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그 후의 보안사 근무를 통해서 국보법에 대한 전문가적인 견식을 갖추게 된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포섭'이 없고 따라서 '활동사항'도 없는데 제가 어떻게 간첩일 수 있겠습니까.

자장면 가격과 간첩활동

조작된 간첩으로서 교도소로 보내질 각오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를 공소보류(국보법 25조) 처분하고 보안사에 근무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저에게 이중으로 고통을 주는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4월에 태어난 제 장남과 처, 가족이 인질로 묶인 상황에서 저항은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1984년 1월부터 1986년 1월말까지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수사지도계(내근 1계)에서 정보분석일을 담당하면서 때로는 모국어가 서투른 재일동포 용의자(피해자)의 통역으로 당시 장지동에 새로 지은 수사과 분실로 나가야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내국인 재외국민을 막론하고 모두 구속영장 없이 보안사령관의 결재, 사인 하나만으로 납치되었고 감금되었고 또 고문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스스로 간첩으로 조작된 데에다 남들의 고통을 보고 들어야 했던 저는 보안사, 즉 군사독재를 국민 앞에 폭로할 것을 굳게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보안사는 해체되어야 하며 군사독재를 타도해야 한다고 굳게 믿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한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소불위의 보안사가 제 생명을 앗아갈 것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고 해도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세살둥이 아들까지 희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외탈출을 계획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986년 2월 1일, 가족을 동반하여 간신히 일본으로 탈출한 그날 밤부터 저는 보안사를 고발하기 위한 수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1987년 원고 일부를 아사히신문사 주간지 <아사히저널> 논픽션 공모에 응모하여 당시 대상감이라는 신문사 측 연락을 받고 고발의 성사를 예감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의 글이 공표되면 아사히신문사가 88서울올림픽을 취재하지 못하게 된다는 신문사 간부들의 판단으로 우수상으로 그쳐야 했고, 우수상을 받으면서도 아사히신문사 측의 판단으로 공표되지 않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1988년 여름에 일본과 한국에서 출간된 저서 <보안사>는 국내 여론의 박수갈채와 함께 보안사에 의한 언론탄압을 당했습니다.

당시의 국내 언론보도에 의하면 국내에서 도서를 출간한 소나무 출판사 유재현 사장은 지명수배되었고, 직원 2명(한분은 유재현씨 부인 안혜련씨)이 연행조사를 받고 전국 서점에서 8000부에 이르는 서적이 보안사와 경찰 요원들에 의해서 불법으로 압수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한겨레신문 특집기사에 의하면 서점 압수량에서 한국신기록을 갱신했다고 합니다.

같은해 가을, 국회 국정감사에서 본인 저서와 관련하여 당시 야당에서는 언론탄압과 그리고 책 내용 자체를 문제 삼겠다고 하여 5공 추궁을 위한 한 자료로 삼아 주었습니다. 또한 제일교회사건('평화공작' 관련)으로 5공비리를 추궁하려던 제일교회 박형규 목사님으로부터 국회 증인으로 나서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에 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증언을 방해하려 한 보안사는 본인에게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출석요구서를 발부하였습니다. 제가 이에 응하지 않자 군기법 위반혐의로 군법회의에 걸어 본인을 기소중지자로 묶었던 것입니다.

그 후 본인에게는 행정제재가 가해져서 주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 여권 신청을 했을 때도 무기한 행정제재자라는 이유로 여권발급을 거절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본인이 현재 거주하는 일본의 지역주민들의 시민단체(에스콥 오사카 생협)가 주관하는 한글강좌 강사 일을 본인 및 본인의 처가 맡게 되면서(1996년)부터 한일 시민교류에 힘써온 결과로서 많은 지역시민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제 딱한 사정을 알게 되자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 앞으로 서명을 모아 탄원해 준 덕택에 행정제재만은 풀려 15년만에 귀국길이 열렸으나 그 동안의 저와 제 가족의 억울한 처지와 고통에 대하여서는 한국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해 주지 않았습니다.

<보안사> 쓸 당시 칼을 몸에 지키고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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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씨가 지난 88년 쓴 <보안사>의 표지. ⓒ 구영식

83년 7월 불법 연행될 당시 저는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하면서 삼성종합연수원 일어과 강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졸 초봉이 30만원 수준이라고 하던 때에 월수 100만원 전후를 받고 있었으며 더구나 다음 해부터는 같은 연수원에서 상근 강사로 근무할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상근 강사 보수는 200에서 300만원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장차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여 대학교 교원의 길을 가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83년 7월 보안사 연행 후 12월까지 무수입 상태가 되었고 제가 감금당하고 있는 동안 생활비로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세 들어 살던 집 전세금을 빼야 했습니다. 84년 보안사로 강제 근무하게 되면서 받은 첫 봉급은 14만7000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86년 일본에 탈출한 후로는 생활이 다급하여 학원 강사, 목욕탕 청소부, 나중에는 대학교 한국어 비상근 강사로 나갔으나 학위를 취득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왔었기 때문에 상근 교원이 될 수가 없어 불안정한 적빈 생활을 영위해 왔습니다. 일본에 와서 특히 7·8년 동안 일본에서 태어난 딸과 네 식구가 된 우리 가족은 이렇다 할 살림도 없이 때로는 쌀 한 톨도 없는 도탄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현재 한글강좌 강사 수입과 본인의 통역 아르바이트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자녀들의 교육비 부담도 어려워 3년 전 아들이 서울대학교로 입학하면서부터는 등록금, 하숙비 등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처가 친척들에게서 학자금을 차용하고 교육비로 충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00년 본인의 귀국이 허락되면서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려고 연세대 대학원 석사 과정에 복학했으나 자녀 교육비 부담도 어려운 처지에서 제 학비까지 마련할 수 없어 학업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그동안의 경제적 손실을 따지려면 그 계산근거를 어떻게 봐야 할지 감 잡지 못하지만, 현재의 화폐 가치로 보면 적어도 원화 수십억원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1988년 불법으로 압수되어 실질적 판금처분을 당한 제 책 <보안사>도 언론탄압이 없었으면 수십만 부는 나갔을 것입니다. 누가 제 일그러진 인생을 보상해 줄 수 있습니까.

보안사에 연행된 후, 보안사 고발을 결의한 후는 더 그랬습니다만 지속된 현실적이며 잠재적인 생명의 위협을 항상 느끼면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서 <보안사>를 집필할 무렵부터는 칼을 몸에 지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또한 상술한 북한 재일공작원 김태명과 그를 중심으로 한 '가족 교포의 회(재일한국민권협 전신)'라는 재일한국인 정치범 구제를 빙자한 북한 위장조직 및 그들과 가까웠던 오사카 한민통(현 한통련) 구성원들이 제가 보안사를 고발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김병진은 한국 보안사의 간첩" "보안사에서 저지른 고문 행위는 모두 김병진의 소행" 등 입에 담지도 못할 몰상식한 유언비어들을 의도적으로 퍼뜨렸습니다.

그 말에 현혹된 조박(오사카 거주 재일 음악인)이라는 자는 저와 제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하는 데까지 이르러 거주지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 북한 공작원들의 일본에서의 보신을 위한 의도적 악선전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것 또한 보안사와 얽힌 사정들의 후유증이라 생각되니 저는 보안사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아온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대답해야 한다

보안사의 불법행위(납치. 감금, 고문, 조작, 강제채용, 언론탄압, 기소중지처분, 여권발급금지 등등)에 의해 절망감에 빠져 한국에서 혹은 일본에서 여러 번 자살할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던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피해와 저만 아니라 많은 고통과 불이익 속에 살은 본인의 가족에 대해서 이제 고국 대한민국은 '대답'해야 합니다.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법개정 작업이 국회에서 논의돼있는 줄로 아오나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유린 범죄는 국가권력을 방패삼아 철저히 밀폐돼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형법상 공소시효 적용에 대해서 본인은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가해자들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엄벌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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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씨 ⓒ 구영식

진상규명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고문 등의 실질적인 인권유린행위를 저지른 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는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들을 지휘한 전두환과 보안사령관 박준병 및 그 후임자들, 그리고 여타 지휘계통에 있던 장교들에게는 엄벌을 가하여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청산 없는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진상규명으로 저와 같은 피해자들을 더 이상 고통 속에 놓아두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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