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진씨가 지난 88년 쓴 <보안사>의 표지.구영식
83년 7월 불법 연행될 당시 저는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하면서 삼성종합연수원 일어과 강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졸 초봉이 30만원 수준이라고 하던 때에 월수 100만원 전후를 받고 있었으며 더구나 다음 해부터는 같은 연수원에서 상근 강사로 근무할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상근 강사 보수는 200에서 300만원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장차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여 대학교 교원의 길을 가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83년 7월 보안사 연행 후 12월까지 무수입 상태가 되었고 제가 감금당하고 있는 동안 생활비로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세 들어 살던 집 전세금을 빼야 했습니다. 84년 보안사로 강제 근무하게 되면서 받은 첫 봉급은 14만7000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86년 일본에 탈출한 후로는 생활이 다급하여 학원 강사, 목욕탕 청소부, 나중에는 대학교 한국어 비상근 강사로 나갔으나 학위를 취득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왔었기 때문에 상근 교원이 될 수가 없어 불안정한 적빈 생활을 영위해 왔습니다. 일본에 와서 특히 7·8년 동안 일본에서 태어난 딸과 네 식구가 된 우리 가족은 이렇다 할 살림도 없이 때로는 쌀 한 톨도 없는 도탄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현재 한글강좌 강사 수입과 본인의 통역 아르바이트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자녀들의 교육비 부담도 어려워 3년 전 아들이 서울대학교로 입학하면서부터는 등록금, 하숙비 등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처가 친척들에게서 학자금을 차용하고 교육비로 충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00년 본인의 귀국이 허락되면서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려고 연세대 대학원 석사 과정에 복학했으나 자녀 교육비 부담도 어려운 처지에서 제 학비까지 마련할 수 없어 학업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그동안의 경제적 손실을 따지려면 그 계산근거를 어떻게 봐야 할지 감 잡지 못하지만, 현재의 화폐 가치로 보면 적어도 원화 수십억원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1988년 불법으로 압수되어 실질적 판금처분을 당한 제 책 <보안사>도 언론탄압이 없었으면 수십만 부는 나갔을 것입니다. 누가 제 일그러진 인생을 보상해 줄 수 있습니까.
보안사에 연행된 후, 보안사 고발을 결의한 후는 더 그랬습니다만 지속된 현실적이며 잠재적인 생명의 위협을 항상 느끼면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서 <보안사>를 집필할 무렵부터는 칼을 몸에 지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또한 상술한 북한 재일공작원 김태명과 그를 중심으로 한 '가족 교포의 회(재일한국민권협 전신)'라는 재일한국인 정치범 구제를 빙자한 북한 위장조직 및 그들과 가까웠던 오사카 한민통(현 한통련) 구성원들이 제가 보안사를 고발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김병진은 한국 보안사의 간첩" "보안사에서 저지른 고문 행위는 모두 김병진의 소행" 등 입에 담지도 못할 몰상식한 유언비어들을 의도적으로 퍼뜨렸습니다.
그 말에 현혹된 조박(오사카 거주 재일 음악인)이라는 자는 저와 제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하는 데까지 이르러 거주지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 북한 공작원들의 일본에서의 보신을 위한 의도적 악선전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것 또한 보안사와 얽힌 사정들의 후유증이라 생각되니 저는 보안사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아온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대답해야 한다
보안사의 불법행위(납치. 감금, 고문, 조작, 강제채용, 언론탄압, 기소중지처분, 여권발급금지 등등)에 의해 절망감에 빠져 한국에서 혹은 일본에서 여러 번 자살할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던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피해와 저만 아니라 많은 고통과 불이익 속에 살은 본인의 가족에 대해서 이제 고국 대한민국은 '대답'해야 합니다.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법개정 작업이 국회에서 논의돼있는 줄로 아오나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유린 범죄는 국가권력을 방패삼아 철저히 밀폐돼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형법상 공소시효 적용에 대해서 본인은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가해자들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엄벌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