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요?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요"

[참관기] 2004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박람회

등록 2004.11.04 07:57수정 2004.11.08 09:48
0
원고료로 응원
"야, 너희들 이리 들어와 봐."

한 여학생이 지나가는 건장한 세 남학생들을 향해 던진 말입니다. 혼자도 아니고 세 명이나 되는 덩치 큰 남학생들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도 아닌 한 여학생의 말 한 마디에 꼼짝도 못하고 들어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a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 박람회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 박람회 ⓒ 안준철

여학생의 손에는 산부인과 의사나 들고 있을 법한 묘하게 생긴 물건이 들려 있었습니다. 여학생은 그것을 남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입에서는 '콘돔'이니 '임신주기'니 하는 말들이 스스럼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여학생이 남학생들을 앉혀놓고 성교육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10월 30일, 제 6회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박람회 구경을 갔다가 그곳에서 목격한 실제상황입니다. 순천지역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꾸려놓은 동아리 방은 무려 서른 아홉 개. 거기에 순천청소년축제를 지원하는 여섯 개 단체가 따로 꾸린 방까지 합쳐 마흔 다섯 개의 방을 구경하는데 무려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a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박람회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박람회 ⓒ 안준철

그 날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이 '또래 상담부' 동아리 방이었는데 그곳에서 선배 여학생이 후배 남학생들을 앉혀놓고 성교육을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주제가 주제인 만큼 순진한 남학생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아 지나가는 후배 자원봉사자들을 불러다 놓고 시범적으로 성교육을 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래 상담부' 동아리 방 바로 옆에는 고교연합 문학 동아리인 '등불' 회원들이 문학청소년들답게 회원들의 자작시를 화폭에 담아 선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흥미를 끈 것은 동아리 방 입구에 쳐놓은 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쪽지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사뭇 궁금하여 물어보니 쪽지에 방문자들의 꿈이나 소원을 적어주면 그곳에 걸어놓고 꿈을 기원해드린다고 했습니다.


a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 박람회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 박람회 ⓒ 안준철

그런 참신하고 예쁜 발상을 어떻게 했는지 문학하는 아이들답다 싶었습니다. 저는 등불 회원인 한 여학생이 건네준 종이에 작은 소원 하나를 적어 다시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 줄에 매다는 아이의 하얀 손을 바라보면서 짧은 한순간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제 꿈을 매다는 저 아이의 꿈도 함께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날 동아리 박람회가 열린 순천대학교 체육관과 그 주변은 수백 명을 헤아리는 청소년들과 시민들의 인파로 술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인파에 휩쓸려 어슬렁거리다가 웬 독일군 복장을 한 세 남학생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군복재현 동아리 회원이었는데 군복수집 인터넷 동아리도 있다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제가 한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a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 박람회. 독일군 복장을 한 아이들.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 박람회. 독일군 복장을 한 아이들. ⓒ 안준철

"왜 하필이면 독일군 복장이지?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혹시 전쟁 반대라든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반감표시라든가 하는 것을 기대하고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예?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요."

처음에는 그 말에 적이 실망했다가, 잠시 후 그 실망이 부메랑처럼 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재미도 의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소치이지요. 더욱이 그곳이 학술발표회장도 아닌 청소년들의 축제의 마당이었는데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 6회 순천청소년축제의 주제는 '느리게 그리고 더불어 다함께'입니다. 젊고 발랄한 청소년들의 축제 표어가 왜 하필이면 '느리게…'인지 의문을 품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더불어 다함께'라는 표어의 뒷말이 설명을 해주기도 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혼자서만 빨리 가면 그만인 그런 개인출세지향의 삶을 원하지 않고 조금 늦더라도 더불어 다함께 손을 잡고 가려는 상생의 삶을 꿈꾸는 것이겠지요.

a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 박람회

순천청소년축제 동아리 박람회 ⓒ 안준철

초고속으로 달리는 도로에서는 풀과 나무와 새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들길이나 산길에서라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이지요. 속도 경쟁이 무서운 것도 바로 그런 이치 때문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빨리 달려 일등으로 골인했지만 정작 소중한 것들은 그가 달리는 도중에 이미 스쳐버린 것일 수 있다는 말이지요. 성적 만능의 입시 위주 교육이 안고 있는 해악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6회 순천청소년축제 일정표를 보면 순천청소년축제위원회가 한 해 동안 벌이는 일들이 단순한 축제나 행사의 차원을 넘어서 또 하나의 '인생의 학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래의 꿈나무들인 청소년들이 '하루만의 화려한 외출'이 아닌 연중 내내 손수 씨를 뿌리고 거두는 '생활 속의 축제'를 체험하면서 착실하게 배우고 익히는 것들이 실로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느끼고 배우는 유익이 크겠지요.

a 2004동천 벽화 함께그리기 완공을 하루 앞두고

2004동천 벽화 함께그리기 완공을 하루 앞두고 ⓒ 안준철

제 6회 순천청소년축제는 지난 4월 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축제설명회를 시작으로 2004 함께 달리기 대회(5월), 축제위/학생회 연합수련회(6월), 세계청소년태권도선수권대회 환영행사(6월), 동천 벽화 함께 그리기 및 동천 여름밤의 콘서트(8월), 순천청소년미술제(10월), 청소년 토론광장(10월)의 숨가쁜 노정을 지났고, 가장 큰 잔치인 동아리 박람회와 동아리 무대공연을 접으면서 12월 청소년 영상제와 열린 음악회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런 행사와 만남의 자리에서 오고갔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우리 청소년들의 미래의 삶을 바르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리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6개 읍면 관통 345kV 송전선로, 근데 주민들은 모른다 6개 읍면 관통 345kV 송전선로, 근데 주민들은 모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