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 태풍' 발원지는 노 대통령?

[정치 톺아보기 76] 노 대통령의 '소신외교' 작동하나

등록 2004.11.08 01:59수정 2004.11.0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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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 지난 7월22일 제주 정상회담 당시의 고이즈미 총리와 노무현 대통령. ⓒ 청와대

난데없이 발생한 '가고시마 태풍'이 그렇지 않아도 복잡 미묘한 한·일 관계를 난기류에 휩싸이게 하는 가운데, 그 태풍의 '발원지'가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오는 12월 17∼18일 한·일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인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가 과거 정한론(征韓論)의 발원지이며,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기지가 있었던 곳이라는 이유 등으로 한국정부가 회담장소 변경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나서부터 한·일 양국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 외교장관 "장소 변경 검토중" vs
일본 관방장관 "예정대로 열릴 것"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4일 기자간담회에서 정상회담 장소 변경을 추진하느냐는 질문에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면서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 보좌관은 "장소 변경 얘기를 일본 정부에 꺼내지는 않았다"고 말해 장소 변경을 추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여지를 남겼다.

또 반기문 외교부장관도 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에너자문회의에 참석해 기자들이 한일 정상회담 장소 교체설을 묻자 "지금 시점에서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검토중인 것은 사실이다"면서 "두고 봅시다"라고 말해 '장소 변경을 검토중'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일본 관방장관은 4일 한국 정계 일부에서 가고시마가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정상회담 장소로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는 보도에 대해 "그런 이야기를 한국 정부로부터 듣지 못했다"면서 "예정대로 열릴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해 사실상 장소를 변경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국 정부가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공식 발표한 것은 지난 10월 8일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이 열린 베트남 하노이에서이다.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회담 개최를 공식 발표하면서 이렇게 그 배경을 밝혔다.

"원래 한·일 정상회담은 7일 고이즈미 총리와 노 대통령이 회의장에서 만나 합의한 것으로 9일 양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최종적으로 실무적인 조율을 거쳐 발표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가까운 시일이 흐른 뒤에, 정한론의 발원지라는 사유를 들어 난데없이 '회담장소 변경 추진'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12월 한·일 정상회담은 지난 7월 제주도에서 개최된 양국 정상회담 때 고이즈미 총리의 노 대통령 방일 초청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이와 관련 당시 청와대와 외교부는 동북아에서 처음 시도되는 '격식 없이 의전을 최소화한 셔틀외교'의 실무 정상회담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었다. 즉, 한·일 정상회담은 양국 정부가 지난 7월에 이미 실무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를 협의해온 끝에 지난 10월8일 날짜와 장소를 합의한 것이다.

ASEM 기간에 노 대통령이 보여준 '이상한 행적'과 반기문 장관에 대한 질책

그런데 서로 합의해 놓고서 이제 와서 개최국에 장소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국제적인 외교관행에 비추어도 '무례한 결례'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일까.

외교관계에 정통한 여권의 한 고위급 소식통에 따르면,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미국·일본 중심의 정부 외교라인에 더는 끌려가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고위 소식통은 이어 "그 해답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5차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기간에 노 대통령이 보여준 '이상한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당초 반기문 외교장관-이종석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은 노 대통령에게 ASEM 기간에 하노이에서 자연스레 한·일 정상회담을 가질 것을 권유했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었고, 반 장관은 그때서야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얘기를 처음 꺼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에 노 대통령은 반 장관에게 화를 내면서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진작 전략적 지렛대를 활용해야 하는데 왜 보고를 안해놓고 이제 와서 그런(안보리 상임이사국) 얘기를 하냐"고 질책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지난 7월 제주도에서 고이즈미 총리와 실무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12월에 일본에서 다시 만나기로 돼 있는 데다가 그 전에도 11월 칠레 APEC 정상회의 및 ASEAN+3(한·중·일) 정상회의가 연달아 예정돼 있기 때문에 굳이 ASEM 기간에 만나야 할 사유도 없었다. 어떤 명분이나 이유 없이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노 대통령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반기문 장관 등은 노 대통령이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어떻게 해서든지 고이즈미 총리와 '조우'할 수 있도록 애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또 일본측도 우리측에 고이즈미와 노 대통령의 '사적인 만남'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노 대통령 이 그런 의도를 알고서 '우연을 가장한 접촉'을 고의적으로 피해 버렸다는 것이다.

중국 총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의'와 '이례적으로 긴' 유엔 개혁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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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던 정상회동 지난 10월7일 베트남 하노이대우호텔 숙소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정상회의를 갖는 노 대통령. ⓒ 청와대

이런 과정 속에서 드러난 노 대통령의 '이상한 행적' 중의 하나가 바로 10월7일 베트남 하노이대우호텔 숙소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의'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다음날인 8일 ASEM 1차 전체 정상회의(정치분야)에 참석해 '유엔 개혁' 등을 주제로 10분 넘게 '이례적으로 길게' 연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행적은 모두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예정에 없던 정상회의를 가진 배경을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4시쯤 원자바오 총리가 갑자기 제안을 해와 당일 9시30분부터 30분간 만나기로 전격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회동이 끝난 뒤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주로 북한 핵문제와 고구려사 문제를 주제로 환담했다고 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이날 원자바오 총리와의 회동에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외교적인 문제를 고려해 논의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을 뿐, 이날 회동에서 이미 민주성과 지역 대표성 등 상임이사국 자격에 대한 원칙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일본의 상임이사국 가입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날 노 대통령이 원자바오 총리에게 자격에 대한 원칙을 밝힌 것은 사실상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공동전선'을 펴기로 보조를 맞춘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노 대통령이 그 다음날 ASEM 정치분야 전체 정상회의에 참석해 '유엔 개혁' 등을 주제로 10분 넘게 '이례적으로 길게' 연설한 것도 그 전날의 한·중 정상회동에서 논의한 의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유엔의 개혁이 시기적으로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개혁의 방향인데 안전보장이사회의 개혁은 민주성과 지역 대표성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상임이사국은 합리적인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에 관해서 소속된 지역이나 집단의 신뢰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상임이사국 '자격'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노 대통령이 연설에서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듣기에도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은 당시 노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와의 접촉을 일부러 피하는 데다가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연설을 한 것으로 간주해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는 후문이다.

일본의 진정한 반성 없이는 정상회담 갖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소신외교'

결국 최근 정상회담 장소의 변경을 요구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노 대통령이 베트남에서 보여준 '이상한 행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즉, 난데없이 '가고시마 태풍'이 발생한 것은 일본의 진정한 반성 없이는 한·일 정상회담을 갖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소신외교'가 작동한 탓인 것이다.

일본은 내년에 종전 60주년을 맞이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걸맞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꾀하고 있다. 따라서 고이즈미 총리의 초청으로 열리는 12월 17∼18일로 예정된 가고시마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노 대통령에게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협조를 요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한국 정부로서는 이에 대한 준비가 안된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시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상임이사국은 합리적인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에 관해서 소속된 지역이나 집단의 신뢰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밝힌 원칙은 일본의 진정한 반성을 촉구하는 노 대통령의 강력한 메시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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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은 왜 다른가 11월 5일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출연한 노무현 대통령. ⓒ 청와대

이러한 강력한 메시지는 최근 노 대통령이 잇달아 국내 과거사 문제 해결에 빗대어 독일과 일본의 사례를 거론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노 대통령은 5일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출연해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 접근방식을 비교한 데 이어 이날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들과의 오찬에서도 독일과 일본의 사례를 거듭 거론했다.

"지금 국제 사회에서 독일과 일본 두 나라가 있습니다. 과거 2차 대전에 책임 있는 두 나라. 독일은 600만 명을 학살한 큰 무거운 죄를 가지고 있는 국가, 일본도 많은 죄가 있지만 독일하고 비교하면 숫자로 봐선 적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국제 사회에서 대우받기론 독일은 아무 과거 과오가 없었던 사람처럼 대우받고 일본은 아직도 과거를 계속 질문 받고 있지 않습니까? 차이가 뭐냐, 독일은 과거를 다 조사하고 샅샅이 조사해서 그 잘못을 국민들에게 또는 전 세계에 인류에게 공개하고 조사하고 공개하고 사과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독일은 국제 사회에서 존경받고 일본은 아직 그 일이 미진해서 뭔가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MBC '여성시대' 출연 발언)

"국제사회에서 독일과 일본의 반인륜적인 비행을 보기에 따라 다르다. 지금 국제사회에서 독일은 존경받는 국가로 손색이 없고 일본은 이런 저런 시비를 받고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런 차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다. 자기 과거 잘못을 어떻게 다뤘는가가 결정적이다. 과거 잘못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복권 여부가 결정된다."('국정원 발전위원' 초청 오찬 인사말)


그런데 이날은 신임 마치무라 노부다카(町村信孝) 일본 외무장관이 방한해 다음날에 노 대통령을 예방하기로 돼 있었다. 즉, 노 대통령은 일본 외상이 방한한 가운데 "일본이 과거 잘못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복권' 여부가 결정된다"고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길래
노 대통령, 원자바오 총리와 즉석 회담·'유엔 개혁' 주제 10여분 연설

예정에 없던 정상회동 정상회동을 갖기 전에 악수하는 원자바오 총리와 노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0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5차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기간에 외교관례상 이해하기 힘든 두 가지 '행적'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10월 7일 숙소인 하노이대우호텔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의'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다음날인 8일 ASEM 1차 전체 정상회의(정치분야)에 참석해 '유엔 개혁' 등을 주제로 10분 넘게 '이례적으로 길게' 연설한 것이다.

노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예정에 없던 정상회담'이 개최된 배경

10월 7일 당시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의'가 갑자기 잡힌 배경에 대해 "같은 호텔 같은 층에 묵고 있는 원자바오 총리가 이날 오후 4시경(이하 현지시각) 갑자기 '이웃사촌'끼리 인사라도 나누자는 제안을 해와 노 대통령 숙소에서 저녁 9시30분부터 10시까지 30분 정도 환담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각국 정상들이 다자간 협의체 회의에 참석하다보면 현장에서 예정에 없던 정상간 회동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처럼 회담을 제안한 지 5시간만에, 그것도 한·중간에 '특별한 현안'이 없는데도 밤늦은 시각에 회담을 갖기로 전격 합의한 것은 이례적인 거였다.

아무튼 실제 회담은 예정시각보다 15분을 초과해 저녁 9시30분부터 10시15분까지 45분간 진행되었다.

회담에 배석한 정우성 외교보좌관은 회담 브리핑에서 "노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하여 차기 6자 회담이 조기에 개최되기를 희망하고 이를 위해서 중국측이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계속해 주기를 요청하였다"면서 "원자바오 총리는 이에 대해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긴요함을 강조하고 상호 노력하자는 입장을 표명하였다"고 밝혔다.

또 양국 관계와 관련해서는 "노 대통령은 최근 양국간 현안으로 대두된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 정부간의 구두 양해사항의 성의 있는 이행을 통하여 원만히 해결되기를 촉구하였으며 원자바오 총리는 이 문제로 양국 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상호 노력해 나갈 것을 희망하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는 '현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 지속된 '구안'이고 고구려사 문제는 이미 지난 8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친서를 갖고 한국을 방문한 자칭린(賈慶林)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과의 회담에서 이미 한 단계 '매듭'이 지어진 사안이다. 노 대통령의 ASEM 및 베트남 국빈방문을 동행 취재한 기자들은 대부분 고구려사 문제 논의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지만, 쉽게 납득이 가는 회담 결과는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왜 ASEM에서 '유엔 개혁' 주제로 10분 넘게 '이례적으로 길게' 연설했나

그 다음날에는 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정치분야 1차 전체회의에서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고 북한의 전략적 결단과 ASEM 회원국들의 협조를 요청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당초 청와대가 사전에 배포한 사전 보도자료에서도 그렇게 돼 있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예상과 달리,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문제를 골자로 한 '유엔 개혁' 등을 주제로 10여분 동안이나 '이례적으로 길게' 연설했다. ASEM에 참석한 EU 집행위원장을 포함해 39개국 정상에게 관례상 3∼4분씩으로 배정된 연설시간에 견주어 10분을 훨씬 더 초과한 노 대통령의 연설은 국제회의 의전상의 결례를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될 정도였다.

또 노 대통령이 "유엔의 개혁이 시기적으로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개혁의 방향인데 안전보장이사회의 개혁은 민주성과 지역 대표성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상임이사국은 합리적인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에 관해서 소속된 지역이나 집단의 신뢰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상임이사국 '자격'에 관해 길게 언급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물론 한국 정부는 이미 9월25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의 제59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유엔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특히 안보리 개편과 관련, '안보리의 대표성과 민주성이 증진되는 방향의 개편 지지'라는 우리의 기본입장을 표명하고 비상임이사국 증설안을 지지한 바 있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유엔 개혁' 발언은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엔 총회에서 정부 공식대표인 외교부장관이 제기할 의제를 대통령이 정상간의 느슨한 대화체인 ASEM에서 제기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또 유엔 개혁은 우리 정부 외교정책의 '현안'이 아니라는 점에서 '타이밍' 상으로도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는 이날 오후 정우성 보좌관이 브리핑을 하면서 "우리 정부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확대보다 비상임이사국을 늘리는 것이 더 급하다는 입장이었는데, 만약 안보리 확대 문제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경우를 상정해 지역의 대표성 등 두 번째 단계에서의 고려사항을 일반적으로 말한 것이다"고 해명한 것에서도 뒷받침된다. 즉 우리 정부에게는 비상임이사국 확대 문제가 더 급한데, 노 대통령은 별로 급하지도 않은 상임이사국 확대라는 만약의 경우를 상정해서 그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일본이 소속된 집단과 지역의 신뢰를 받으면 될 것 아닌가"

국제외교 관례에 비추어 특히 예민한 대목은, 노 대통령이 연설에서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듣기에도 '민주성'과 '지역 대표성'이라는 기준은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브리핑에서도 일본과 연관지어 물어보는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다음은 당시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요약한 것이다.

-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의식한 발언인가.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주셨으면 좋겠다. 이것은 앞으로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나라가 상임이사국에 적합하냐, 하는 것을 검토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이지 이것이 어느 한 특정국가를 놓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안보리 상임이사국 증설했을 때 거기에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을 이러한 관점에서 검토해 나가겠다는 의사이다."

- 반기문 외교장관은 반대의 뜻을 밝히셨는데...
"우리 정부는 어떤 특정국가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에 대해서 입장을 아직까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언제 수가 늘 것이냐, 언제 결정될 것이냐 하는 시기는 좀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 소속된 집단과 지역의 신뢰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일본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미 아닌가.
"일본이 소속된 집단과 지역의 신뢰를 받으면 될 것 아닌가. 지금 투표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우리는 앞으로 이런 소속된 집단의 신뢰라는 것을 중요시 여기겠다, 그러면 (일본이 소속된 집단의) 신뢰를 받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노 대통령의 발언은 '일반적 원칙'을 이번 기회에 밝힌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특히 일본은 ASEM 기간에 다양한 양자간 정상회담을 통해 일본 외교의 숙원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여론을 확산시키는 기회로 활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거부권'을 갖고 있는 유엔 상임이사국인 중국 정상과의 회담을 현지에서 만들어내기 위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ASEM 참석기간을 예년보다 이틀 가량이나 넉넉히 잡는 등 심혈을 기울였으나 중국이 회담을 거부하는 바람에 스타일만 구기고 말았다. 이에 반해 중국은 한국 정상과는 예정에 없던 회담을 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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