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한' 품고, 사랑으로 키웁니다

특수학급 장애학생을 둔 박정희씨의 24시

등록 2004.11.08 11:47수정 2004.11.0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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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교육예산 확보를 위한 투쟁이 한창이다.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장애학생 어머니들이 모여 점거농성을 실시하는가 하면 국회 앞에서 무기한 단식을 실시하는 등 투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농성장에 참여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이유는 아이의 등하교에 엄마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열린 정부청사 앞 집회에서 전국 장애학생 어머니들이 대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을 돌봐줄 자원봉사자들이 충분히 지원됐기 때문이다. 장애학생을 둔 어머니들은 항상 아이들의 그림자처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해야 한다. 특수학급에 다니는 장애학생을 둔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마음에 지난 3일 직접 이들을 따라가 봤다.

하루 해가 짧은 '그림자 생활'

박정희(42)씨의 하루는 아침 7시 아들 경원이(11) 뒷바라지로 시작한다. 발달장애가 있는 경원이를 학교에 보내려면 아침부터 큰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경원이가 3학년이 되면서부터 옷 정도는 알아서 챙겨 입어 그나마 다행이다.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학교에 8시 40분까지 도착하려면 8시쯤부터가 한창 바쁠 때이다. 이것도 박씨가 경원이를 특수학급이 있는 이 학교로 보내기 위해 경기도 일산에서 송파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나아진 것이라고.

박씨는 경원이가 교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돼 집으로 온다. 집안 일을 마무리하고 12시가 좀 지나면 박씨는 어김없이 다시 하교하는 경원이를 데리러 간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교실까지 찾아가 경원이의 가방을 대신 싸고, 청소를 해준 뒤에 나왔지만 이제부터는 경원이 스스로 하는 법을 깨치게 하기 위해 교문에서 경원이를 기다린다. 가끔 양말을 빼놓고 온다든지 물건 하나씩을 빼놓고 오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경원이의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감수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 내 학습보조도우미도 없어, 아이가 걱정이 되는 마음에 박씨가 학습보조도우미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자신의 시간을 모조리 경원이에게 빼앗겼지만 그저 아이의 수업시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담임교사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학교 내에서 박씨가 하는 일은 경원이 반 친구들에게 경원이의 장애를 이해시키는 일이었다. 발달장애로 자신의 의사표현이 서툰 경원이를 아이들에게 하나 하나 설명해주고 잘 지내라는 부탁도 잊지 않는다.

장애교육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갖춘 1대1 학습보조도우미가 있다면, 박씨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그는 "우리 나라에서 그런 단계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말한다. 수업이 끝나고 경원이의 가방을 어깨에 멘 박씨는 신호등에서, 분식집 앞에서 행여나 돌발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학교-음악-심리치료기관' 좇아 종종걸음

집에 도착한 박씨는 경원이 치료교육을 위해 숨돌릴 틈도 없이 외출을 서두른다. 그래도 집에 들르는 것은 가방도 놔두고 지저분해진 경원이의 옷을 갈아 입히기 위해서다. 귀찮지만 하루에 두 번씩은 옷을 갈아 입힌다고 한다.


a 경원군이 한 장애인복지관에서 음악치료교육을 받고 있다.

경원군이 한 장애인복지관에서 음악치료교육을 받고 있다. ⓒ 이지현

경원이는 음악치료와 심리체육치료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다. 한 달 사교육비만 해도 월 20~30만 원. 얼마 전까지 사립시설을 이용할 때는 100만 원 정도 했으니, 많이 줄은 셈이다. 이것도 장애가 심해서 한 달에 200만 원을 호가하는 전문교사를 불러 치료교육을 실시하는 경우에 비하면 적은 액수다.

음악치료교육은 마천동, 심리체육치료교육은 복정동에서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박씨는 이동시간이 교육시간만큼 길다. 그렇지만 치료교육을 받기 위해 수원에서 톨게이트 3개를 지나 복정동까지 오는 다른 아동의 어머니를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른다.

경원이가 치료교육을 받는 35분, 그리고 50분 동안 A씨는 복도에서 책을 읽거나 테이프를 들으며 묵묵히 기다린다. 옆에 어머니들과 친해지면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간·돈 쏟아 부어 이중고-정부는 외면

며칠 전에는 박씨가 친정에 볼 일이 생기는 바람에, 덩달아 경원이도 치료교육을 받으러 가지 못했다. 버스를 몇 번씩 타고 15분 이상 걸어야 하는 복지관에 혼자 보낼 수가 없어 친정까지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박씨는 "학교에서 방과 후 교육을 시키면 돈도 덜 들고 아이를 마음 편히 맡길 수 있어 볼 일도 볼 수 있을 텐데….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되면 모두 엄마 탓이 되는데 어떻게 아이를 혼자 놔두고 다른 일을 볼 수 있겠느냐"며 "조금 피곤해도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게 마음 편하다"고 말했다.

장애학생을 둔 학부모들은 모두 가슴에 한을 품고 산다. 박씨 또한 경원이를 일반유치원에 보내려 했을 때, 거부당했던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경원이를 보는 이상한 눈빛과 "이런 아이를 어떻게 우리 유치원에 데려올 생각을 했느냐"라는 식의 말들이 박씨에게 상처로 남은 것. 그러다 보니 학교도 1년 늦게 들어갔다. 그러나 장애학생이면 1, 2년 유예는 흔히 있는 일로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박씨는 "장애인 교육권 예산을 확보해 방과 후에도 수업을 실시하고 학습보조도우미를 둔다면 능력있는 많은 어머니들이 사회로 나와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을 텐데…"라며 한숨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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