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51회

등록 2004.11.09 07:46수정 2004.11.0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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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이런 기회를 놓칠 경여가 아니다. 경여는 갈유에게 나직히 말을 건넸다.

“갈대인...언제까지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 생각이신가요?”
“허허...제수씨..돌팔이 의원은 부지런해야 밥술이라도 뜨는 법이요. 아직 발에 힘이 있으니..”
“그렇게 얼버무려 넘어갈 생각은 마시구요.”


경여가 단호하게 나오자 갈유는 들었던 술잔을 내려 놓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이오?”
“규아는 비록 소첩이 배가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더라도 소첩의 자식이라 생각해요.”
“허...누가 아니라고 했소. 그 점에 있어서는 나나 이 친구나 인정하고 있소.”

손불이가 갈유의 처지를 생각해 말에 끼어들자 경여는 손불이를 노려 보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무엇을 가지고 지금 이러는지 원..”
“두 분 다 규아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나요? 이미 나이 스물이예요. 그 나이면 벌써 애 낳고 사는 사람도 많아요.”

경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두 사람은 이제야 감을 잡았다. 사실 경여가 그런 말을 꺼낸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니다.


“갈대인께는 죄송하지만 이번엔 안되겠어요. 갈대인 처분만 기다리다간 손주 한번 못 안아 보고 죽을 것 같군요.”
“험...험...”

갈유는 다시 빈잔에 술을 따라 단순에 들이켰다. 사실 할 말이 없다.


“갈대인께는 죄송하지만 말씀드리겠어요. 이런 일은 규아의 생모(生母)가 챙겨야 하는 일이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니 제가 챙길 수밖에 없군요. 마음이 상하실 것 같지만 어렵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생모(生母)라면 아직 갈인규의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말이다. 갈유는 다시 술잔에 술을 따른 뒤 한번에 들이켰다. 얼굴은 씁쓸함과 회한이 묻어 나온다.

“아니오....제수씨가 하는 것에 대해 누가 뭐라겠소. 이 갈모도 사실 제수씨에게 감사하고 있소.”

말은 그러해도 그의 마음은 아프다. 아내가 챙긴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이 설흔 여덟에 만난 아내다. 나이차가 많아 처음부터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었지만 아내와 처가(妻家)에 대해 잘하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처가는 그들 가문의 법도(法度)를 요구했고, 갈유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졌다면 회한(悔恨)도 없다. 하지만 아직 젖먹이 아이를 안고 사랑하는 아내를 그곳에 놔둔 채 그는 자신의 고향인 사천 땅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사천 땅을 밟지 않은 지 벌써 이십년이 되어간다.

“죄송해요.”
“괜찮소...제수씨. 누가 뭐래도 규아의 어머니는 제수씨요.”

술이 오르나 보다. 언뜻 그의 노안에 물기가 서린 것도 같았다.

“혹시 갈대인께서 마음으로 정한 여식이라도 있으신지요.”
“허허.... 그게 내 마음 먹은대로 되겠소? 어차피 한 평생 떠도는 나에게 딸자식을 며느리로 선뜻 내놓을 집안이 있겠소?”

의술로는 중원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는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도 고향에서는 일년 중 두세달 정도의 외유면 족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온 뒤로는 그는 어디 한군데 정을 붙이지 못한다.

“제가 한군데 봐 두었어요.”
손가장 만큼 손님이 들끓는 곳도 없다. 그녀의 사람을 보는 안목 또한 인정하는 바다.

“산서표국(山西驃局) 아시죠?”
“설국주(薛局主)를 말함이오?”

손불이가 약간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래요. 그 분이 서너번 여기 들른 적이 있지요? 아마 올 초에도 여식과 함께 들렀었지요?”
“그렇군.....당신이 왜 그랬는지 이제야 감이 잡히는군. 허허....괜찮지.”

손불이는 고개를 끄떡였다. 올초 손가장에 들렸던 하얀 모피 옷을 입고 있었던 소녀가 생각났다. 흑요석 같이 반짝이던 눈과 발그레한 볼을 가진 뛰어난 미색(美色)이었다.

“아마 무서운 침(針)을 가지고 있다 해서 강북일봉(江北一蜂)이라 불린다고 하던데 이러다 규아를 내 꼴 만드는거 아닌가?”
“뭐라구요?”
“허허....아니오....”

손불이는 무심결에 말했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강남에 강남삼미(江南三美)가 있다면 강북에는 일봉이화(一蜂二花)가 있다. 본래 강북의 미인들은 강남의 미인들과는 약간 다르다.

미색의 뛰어남이야 공통적인 것이지만 강남의 여인들은 살결이 희고 약간 통통한 편인데 비해 강북의 미인들은 크고 날씬하다. 손불이가 곤혹스러하는 것을 본 갈유가 경여에게 자신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산서표국이라 하면 강북 제일의 아니 중원 제일의 표국이외다. 더구나 설덕조(薛德操) 국주는 산서상인연합회 오대수장 중 한명이오. 허헛...그런 가문에서 나와 같은 떠돌이 의원의 자식에게 딸을 주겠소?”

강북 제일의 표국이면 당연히 중원 최고의 표국이다. 산서상인의 장사는 반드시 표국이 필요한 것이었고, 강남보다는 강북의 표국을 훨씬 더 알아준다.

“참....어찌 그런 자신 없는 말씀을 하세요. 이 중원 천지에 갈대인을 무시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 걱정은 마시고 반대만 안 하신다면 제가 추진할 것이니 그리 아세요.”

이건 일방적 통보다. 반대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번 일을 마치면 규아만큼은 다시 이곳으로 보내세요.”
“끄---응--”
“끙----”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왜소한 체구의 여인 경여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 × ×

그것은 느닷없는 일이었다. 갈인규의 거처인 소규헌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한 후 천고헌에 다달을 때였다.

“담도우(曇道友). 한번 받아 보시겠소?”

담천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현진의 일권이 담천의를 향해 뻗어왔다.
웅---!
진력을 모두 실은 것은 아니지만 정통으로 맞으면 혼절할 정도의 경력이다.

“왜 이러시오?”

담천의는 그에게 살의가 없음을 알자 몸을 피하며 비켜섰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현진같은 사람이 출수를 하는데는 이유가 있을게다.

“피하지 말고 받아 보시오.”

재차 다가드는 권풍은 그의 양옆구리를 노리며 다가들었다.

“이유를 말씀하시지요.”

담천의의 움직임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현진의 저러한 공격은 웬만한 고수도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담천의의 움직임은 부드럽게 피하기만 하고 있었다.

“.........!”

그것을 본 현진의 움직임은 부드러운 가운데 더욱 빨라졌다. 아까는 태극권(太極拳)인 것 같더니 표흘한 움직임과 함께 날카로움이 곁든 태극십팔해(太極十八解)다.

잡아 채고, 미는 것 같더니 때리고 당기는 것이 무당의 진기(眞技)다. 기교(技巧)나 화려함보다는 간결하되 부드럽고, 부드러운 가운데 빠름이 있다. 수공(手功)이되 장경(掌勁)이 혼합되니 어느 것이 진실된 공격인지 알 수가 없고, 느끼는 압력은 더욱 가중된다.

담천의는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나 자신과 손속을 섞으려 한다. 그는 피하려다 부드럽게 양손을 떨치며 마주쳐 갔다.

타타타---닥---!

그리 크지는 않지만 결코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운 타격음이다. 그들의 손과 팔이 엉키고 허공에서 부닥치며 나는 소리되 잘못 맞으면 골절이라도 될 강력한 힘이 실려 있다. 왜 갑자기 현진이 자신을 공격하는지 몰랐다. 또 살의(殺意)나 적의는 보이지 않으니 자신을 상하게 하고자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비무는 더 더욱 아니다. 부드러운 경력들이 밀려 나가고 스쳐 지나간다.

“조심하시오. 담도우!”

몇 수를 지나가도 담천의가 가볍게 피하며 방어만 할 뿐 진실된 무학을 보이지 않자 현진의 기세는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파---팍---!

도포가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그의 꼿꼿이 세워진 수도(手刀)가 삼십육방위를 점하며 공격해 들어갔다. 태극십팔해의 위력은 점차 가중되고 있었다. 왜 그가 무당의 다음 대를 이끌어 갈 인재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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