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53회

등록 2004.11.11 08:03수정 2004.11.1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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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화두(話頭)

산서상인연합회(山西商人聯合會)는 모두 오대수장(五大首長)을 정점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오대수장 중 한사람이 회주(會主)로 추대되고 회주가 회의 주재 및 결정권을 갖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오대수장들의 회의에서 결정한다.


오대수장은 전장업(錢場業), 미곡업(米穀業), 숙박업(宿泊業), 운송업(運送業), 군수업(軍需業)의 다섯가지 업종의 대표를 의미한다.

산서상인은 본래 금융업과 군수물자 및 군량을 조달하여 전쟁터까지 운반해 주고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다. 그 다섯가지의 업종은 사실상 산서상인을 대표하는 업이다.

산서상인연합회의 회관(會館)은 태원부(太原府)에 있었다.
태원은 교통의 요충지로 산서성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곳이다. 수많은 명승지는 물론 산서와 하북지방의 돈은 모두 태원에 있다고 할만큼 상업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회관안 천금각(千金閣)에는 네 인물이 앉아 있었다. 본래 천금각은 공식적인 오대수장의 회의청이며 수십만의 식솔을 가진 산서상인의 운명을 결정지을 안건이 처리되는 곳도 여기다. 가운데 앉은 육순이 더 되어 보이는 왜소한 노인이 바로 산서상인연합회의 회주인 금적(金積)이다. 전장업(錢場業)의 수장으로 삼대에 걸쳐 부를 쌓아온 금가의 가주.

그는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가 가진 금과 은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 자신도 모른다고 할 정도다. 그가 운영하는 산서전장(山西錢場)이 발행한 전표(錢票)는 강북은 물론 강남의 신안상인들도 인정하는 현찰이다. 오히려 나라에서 발행한 동전보다 그의 전표를 더 확실하게 생각한다.


다섯 개의 의자 중 하나가 비어 있었다. 바로 군수업(軍需業)의 수장인 양만화의 자리다.

“사실 이 일은 결론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네.”


회의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무거웠다. 서로간의 의견 차이도 컸지만 사안(事案)이 상인들이 처리하기에?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수십만의 우리 식솔들이 거리에 나 앉을 수도 있네.”

오대수장은 언제나 산서상인연합회에 속해있는 식솔들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을 결정하고자 할 때 단지 그들의 감정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일을 방치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요. 그는 이곳의 오대수장 중의 한명입니다. 그를 잃으면 본 회의 손실도 그만큼 커지지요.”

말을 한 사람은 미곡업(米穀業)의 수장인 장보현(張寶泫)이다. 쌀을 비롯해 온갖 곡물류는 그의 손을 거친다.

“장노형의 말이 옳소이다. 아직 이 나라는 오랑캐 족들의 위협이 상존해 있고, 황상께서는 그 위협을 제거함과 동시에 남해를 정벌한다든지 서역까지 정벌할 생각을 가지고 계신만큼 본 회의 흥망성쇠는 아직 군수업이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오.”

산서표국의 국주인 설덕조(薛德操)의 말이었다. 넓은 이마에 굵은 검미(劍眉). 그 아래 정광을 뿜는 호목(虎目)에 완고한 모습이 보이는 사각턱을 가진 오십대 초반의 인물이었다. 표국업의 수장인 그는 전형적인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양제(楊弟)만한 인물도 없을뿐더러 문제는 같이 살기로 한 우리들이 그의 위험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냐는 거외다.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나중에 이 자리의 누군가가 똑같은 위험에 처해도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다는 전례(前例)를 만들게 되오.”

“허..음...! 설국주의 말씀은 맞소. 하지만...”

입을 연 것은 숙박업의 수장인 서문량(西門亮)이다. 그가 운영하는 강북 주루와 기루의 숫자가 백여개를 훨씬 넘는다고 한다. 더구나 그는 그것과 함께 도박장이나 홍등가까지 운영한다. 실제로 알짜배기 돈을 챙기는 것은 그라고 할 정도였다.

나이는 설덕조와 비슷하나 풍기는 인상은 정 반대다. 서문량의 모습은 오히려 문사풍으로 지방 학유(學諭)라 해도 틀릴 것 같지 않았다.

“초혼령의 행사는 엄격하게 말해 우리의 본업과 관련이 없소. 왜 초혼령이 십사오년만에 다시 나타났는지 모르나, 과거 초혼령의 행사에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게 원칙이오. 구파일방까지도 그들의 행사에 간섭하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오.”

그의 말이 맞다. 초혼령은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도 간섭할 수는 없을 것이오. 이미 양제의 천고문이 걸렸고 그의 죄상은 누구나 다 알고 있소.”
“그의 죄를 논하자면 우리라고 다를까?”

장보현(張寶泫)의 반박이다. 부를 쌓기 위해 그들이라고 양만화와 다르게 옳기만 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도 죄를 따지자면 양만화에 못지않다.

“참...장노형도...양제가 나쁘다고 말한 것은 아니오. 명분이 없는 건 사실 아니오. 양제가 얼마나 소림과 화산, 종남파와 우의가 두터웠소? 하지만 그 세 곳도 이번 일에는 양제의 도움 요청을 거절할 것이오.”
“그렇기에 우리마저 모른 척 하기는 너무 몰인정한 처사라는게요.”

회주인 금적은 염소수염을 배배꼬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참 난감한 문제로군. 문제는 이 일에 우리가 끼어들다면 이제는 미지의 초혼령과 전쟁도 불사할 각오가 있어야 하네. 하지만 서문제가 말했듯이 명분이야. 연합회가 돕자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 자들이 기득권을 지키자고 나섰다 할 것이고, 개인적으로 돕자니 똑같은 놈들이 나섰다고 할 판이야.”

회가 결성되면 사심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개인적인 움직임이 회 전체의 일이 비치게 되기 때문이다.

“욕을 먹는다 해도 소제는...”

설덕조가 말을 꺼내자 금적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한사람 잃는 것으로 족해. 설노제는 감정을 가라앉히게. 우리는 모진 어려움을 겪으며 연합회를 키웠어. 우리에게 딸린 식솔들을 먼저 생각하게.”

금적이 얼마나 설덕조를 위하는지 모두 안다. 젊은 시절부터 금적은 설덕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하지. 양제의 경우 나름대로 준비는 할거야. 그가 원하는 것은 명분을 얻기 위한 숫자일거야. 많은 숫자가 오면 그만큼 그에게는 그의 죄과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결과이고 선행도 많이 행했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야.”

금적은 철저한 상인이다. 상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형세에 대한 판단이다. 양만화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무림고수도 필요하겠지만 연합회에서 보내준다 하더라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고수는 거의 없다.

“연합회의 건천위(乾天衛) 이십명을 보내기로 하지. 연합회가 이 일에 위험을 무릅쓰고 개입했다는 명분도 서고, 다른 무림인들을 끌어 모으는 효과도 있을테니까....”

건천위는 외부로 알려진 산서상인연합회의 호위무사들이다. 연합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회관의 방위나 주요인물의 호위가 그 목적이다. 하지만 군역을 마치거나 시정부랑자들이 주축이 되어 이삼년 정도 규율을 가르친 무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진정한 연합회의 고수들은 건천위가 아니다.

“너무 박정하신 것 아닙니까?”

설덕조가 아직도 불만인 듯 반박했다.

“하나만 확실히 하지. 건천위 외에는 개인적으로도 절대 도와주면 안되네. 그리고 만약 이번에 건천위를 보낸 것에 대해 초혼령에서 우리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해 온다면 연합회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할 것이네.”

역시 회주는 회주다. 그는 연합회 전체를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전설의 초혼령이라도 산서상인연합회와의 전쟁은 어렵다. 금적은 오히려 개인적인 도움이 있었을 경우 초혼령이 그곳을 친다면 또 그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서문량과 함께 장보현도 고개를 끄떡였다. 수긍하겠다는 뜻이다. 설덕조도 더 이상 반박하기 어려웠다. 이상의 요구는 무리다.

“근본적으로 연합회의 체질도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소. 앞으로 벌어질 신안상인들과의 전쟁도 대비해야 할테니.”

장보현의 말에 금적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 역시 이번 일로 인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양만화 하나를 위해서 연합회 전체를 걸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양만화의 야심을 경계했었다. 양만화는 적극적이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너무 야심이 크다.

그런 사람은 처음에는 연합회에 도움이 되지만 후에는 연합회를 망하게 할 위험이 큰 사람이다. 어쩌면 그가 이번 일로 죽게 되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양만화의 후계인물도 의중에 두고 있었다. 어느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 죽음이 설사 금적 본인이라 할지라도 연합회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철칙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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