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54회

등록 2004.11.12 07:50수정 2004.11.1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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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소림사에 도착한 것은 저녁 노을이 숭산의 발아래 걸린 초저녁 무렵이었다. 손가장을 떠난 지 이틀만이었다.

최초에는 마차 세대로 출발했으나 소림사를 방문 후에 잠시 들려 달라는 부탁과 함께 전연부 일행이 낙양에서 멈추게 되자 그들은 마차 두 대만으로 소림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혜각대사의 사제 혜원(慧元)이었다. 혜각이 자리를 비운 동안 지객당을 맡고 있던 그는 일행을 친절하게 맞이하며 지객당 안쪽으로 안내했다.


무당의 현진과 그 사제는 다른 곳으로 안내되었고, 광무선사와 혜각도 제자리로 돌아간 지객당에는 갈유를 포함해 일곱뿐이었다. 마침 저녁공양 전이어서 일행은 저녁식사를 하고 지객당(知客堂)에서 소림방장의 부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소림의 분위기는 왠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였다.

무림의 태산북두로 자리를 지켜 온 소림.
그렇다고 대웅보전이나 각 전각이 타 사찰에 비해 웅장한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 모두는 천년세월을 지켜온 소림의 모습을 보며 세월만큼이나 장엄함을 느끼고 있었다.

담천의는 지객당의 뒤뜰이라고 할 수 있는 천림해(天林海)에 서 있었다. 천림해는 숭산의 고봉(高峰)을 모두 볼 수 있고, 발 아래에는 수림이 마치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된 일은 아니되 그는 그 과정에서 다시 삶에 대한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몰라 볼 정도로 많은 변화를 거쳤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어차피 돌아가야 할 것이다. 가서 다시 한번 부닥쳐야 한다. 하지만 아직 자신이 없다. 태극산수를 깨친 후에 그는 무공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고, 자신도 생겼다. 그래도 자신이 없다. 광노제라 불리던 인물하고는 어찌 해 볼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인물을 호위로 거느리고 있는 인물이다.


은연 중 풍기는 모습도 만인을 호령할 수 있는 기품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를 죽이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곳을 빠져나와 세상에 묻혀 있으면서 그는 은연중에 그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사람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확신은 더해왔다. 어차피 아홉 살의 치기 어린 오해는 그를 무공을 익히도록 하였지만 많은 것을 버리게 했다. 하지만 어쨌든 한번은 돌아가서 만나야 했다. 그 만이 자신의 신세를 알려 줄 것이다.

(천중무극검(天中無極劍)의 요결을 완전히 깨우쳐야 하겠지.)

천중무극검은 그가 익힌 검이다. 검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검도(劍道)다. 익히는 초기에는 변(變)을 위주로 한 검법이라고 생각되지만 익힐수록 그것은 특별히 초식이 있는 것이 아닌 검로(劍路)와 그에 따른 길(道)을 깨우쳐야 형상화되는 검도였다. 발검(拔劍)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검을 잡는 마음이다.

그는 수십번... 수백번을 깨우치며 노력했다. 한번 깨우치면 또 다른 세계가 열렸다. 하지만 그 길은 끝이 없었다. 어쩌면 그가 평생을 깨우친다 하더라도 그 끝에 도달하게 될지 알 수 없다. 다가왔다가는 저만큼 가있는 검의 길.

그래서 하늘 속의(天中) 끝이 없는 검(無極劍)이라 이름 붙였는지 모른다.

“후---우---”
그는 나직히 탄식을 터트렸다. 답답한 마음이 발아래 펼쳐진 천림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아미타불...!”

그의 등뒤로 혜원이 다가 오고 있었다. 사형 혜각이 자리를 비운 뒤로 지객당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이미 도착할 때 인사를 나누었기에 말을 나누기 수월하다.

“담시주께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탄식을 들었는지 모른다. 담천의는 같이 합장을 하며 얼굴색을 고쳤다.

“아닙니다. 펼쳐진 천림해를 보니 사람이 티끌 같은 존재라 생각했지요.”
“이곳을 보면 대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지요. 중생(衆生)은 귀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장 쓸모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자연의 위대함에 비교하면 티끌 같은 존재지만 그 자연 속에 어울리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요.”

이미 천림해는 어둠 속에 파묻혀 검은 바다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제가 어찌 그런 도리를 알겠습니까? 그저 느낌일 뿐이지요.”
“아...소승이 너무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숙께서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광무선사께서 말입니까?”
“예. 달마원(達磨院)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왠일로...?”

혜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떼었다.

“소승이야 모르는 일이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혜원의 발걸음이 느릿한 것 같기는 하나 부드럽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미 그의 공부가 상승에 달했다는 뜻도 된다. 그를 따라가는 담천의는 고요 속에 잠겨 있는 소림을 보면 기이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일까? 우리 일행 때문에 이런 것인가?)

그는 어둠 속 곳곳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만약 외인이 들어왔다면 절대 빠져 나갈 수 없는 삼엄한 경계였다. 간혹 자리를 지키고 있는 승려들도 보였지만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소림승들이 더 많았다.

(용담호혈(龍膽虎穴)이라더니... 대단한 승려들이 많구나.)

그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알아챌 수 있는 인물들도 꽤 있었다. 만약 그들이 숨자고 한다면 담천의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지객당에서 달마원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체구가 큰 광무선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달마원 안에 있지 않고 연무장이랄 수 있는 안마당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숙...담소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 말에 광무선사는 천천히 신형을 돌려 혜원을 바라보았다.

“수고하셨네. 지객당에는 아직 혜각이 내려오지 않았는가?”
“아직 사부님 방에 있는 것 같습니다. 소질은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는 공손하게 광무선사를 향해 합장을 하고 담천의에게도 가볍게 예를 표한 다음 다시 지객당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쩐 일로 소생 같은 외인을 이곳까지 부르셨습니까?”

달마원이 어떤 곳인지 아는 까닭이다. 달마원은 소림의 무공뿐 아니라 타파의 무공까지도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은 거의 외인을 들이지 않는다.

“허허... 이미 소림에 들어선 그대가 외인(外人)이라면 저 나무에서 눈을 반짝이는 부엉이는 외인인가 아닌가?”

가지가 무성한 떡갈나무 속에는 부엉이 한 마리가 먹이를 노리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선문답(禪問答)을 하자는 것인가?

“저는 선사의 고매한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가 광무선사를 본 것은 사흘전이다. 같은 마차를 타고 왔다하나 담천의는 서가화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갈인규와 함께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았다. 그리 많은 대화나 접촉은 없었다. 하지만 이리 불렀으니 무슨 뜻이 있을게다.

“그렇군.....시주 말이 옳아. 노납 역시 말해 놓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를 매달고 있되, 그의 호목(虎目)은 암석이라도 꿰뚫듯 담천의를 보고 있었다.

“담시주. 노납(老臘)의 궁금증을 풀어 주시겠나?”

이 또한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담천의는 주위의 보이지 않는 시선을 따갑게 느끼며 광무선사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소생에게 어떠한 궁금증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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