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류신문' 중앙일보의 작심삼일

[유창선 칼럼] 남북대결 부추기며 어떻게 '통합자' 자임하나

등록 2004.11.15 08:37수정 2004.11.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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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1월 11일자 1면.
중앙일보 11월 11일자 1면.중앙일보 PDF

중앙일보. 국내 발행부수 2위의 신문이다. 이 중앙일보가 '일류신문의 문턱에 와 있다'고 홍석현 회장은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홍 회장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않는다. 왜냐고? 여기 생생한 사례를 한번 들어보겠다.

지난 주 목요일 아침, 김일성 방송대학의 홈페이지에서 인터넷방송을 시작했다는 보도가 중앙일보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북 주체사상 인터넷 공습'이라는 제목을 달고 말이다.

인터넷 공습이라. 북한이 폭격기 대신 인터넷으로 남한을 쳐들어온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이 기사는 "전방의 철책이 뚫린 것보다 심각할 수 있다"는 통일부 당국자의 말을 소개하며 끝맺고 있다.

선정적인 제목에 눌려 '큰 일 났다'는 생각을 하고 지나갔다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다시 이성의 잣대를 가지고 뜯어보니 석연치않은 구석이 여럿 발견된다.

우선 문제의 인터넷 방송이 과연 우리 사회를 '공습'하려는 목적의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중앙일보 기사에서는 "이 사이트는 북한이 인터넷 불모지란 점에서 사실상 남한 사회를 겨냥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단정에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냥 그럴 것으로 믿어 의심치않는다는 식이다. 상상력이 생명인 소설가가 쓴 글이라면 모를까, '사실'이 생명인 기자가 쓴 글 답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북한이 우리 사회를 염두에 두고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북한이 자체적 필요에 따라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북한이 남한을 염두에 두고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다?

북한은 1999년 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동안 당이나 정부, 군 부대 등 제한된 인원만 접속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래도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종합대학 홈페이지같은 북한 내부 인트라넷 접속은 일반주민들에게도 허용되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근래 들어 북한당국은 인터넷 기반구축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어, 정책적으로 허용만 되면 북한에서도 인터넷이 빠른 속도로 확산될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렇다면 김일성 방송대학의 인터넷 방송은 북한 대내용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일이다. 특히 앞으로 인터넷 보급 확대를 염두에 두고 이같은 방송을 시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일성 방송대학이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 배경을 아직 정확히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인터넷 공습'으로 단정하는 것은, 결국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남북대결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물론 경계의 구분이 없는 인터넷공간에서 북한용, 남한용, 해외용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두 번째의 문제는, 중앙일보가 발휘한 상상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설혹 우리 사회를 겨낭한 것이라 해도 그게 그렇게까지 요란을 떨 일이냐는 점이다. 하지 못하게 하니까 호기심이 발동했던 1980년대 시절이라면 모를까, 인터넷 방송이 된다고 해서 거기 들어가 주체사상 학습하고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만 가도 <노동신문>을 비롯한 온갖 북한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는 세상에, 정보와 자료가 홍수를 이루는 지금 세상에, 김일성 방송대학의 인터넷 방송 덕분에 주체사상을 학습하게 되는 경우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원하는 정보나 자료는 뭐든지 다 구해볼 수 있는, 그야말로 국경없는 인터넷 세상에, 이런 식의 호들갑은 너무도 안 어울려 보인다. 중앙일보의 시계는 아직도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확인조차 안된 상태에서 논리적 비약으로 일관한 기사를 버젓히 1면 머리기사로 올리고, 사설에서까지 "인터넷을 통한 북한의 선전선동 공세가 날이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중앙일보. 그 신문이 '일류신문의 문턱에 와있는 신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중앙일보의 시계는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닌지

문제는 중앙일보의 이같은 보도가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 7월 의문사위원회 조사관들의 전력을 문제삼아 대서특필하며, 의문사위원회에 대한 색깔공세에 불을 붙였던 것도 바로 중앙일보였다.

근래 들어 중앙일보의 사설과 칼럼들을 보면 보수적 색채의 강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노동문제 등에서부터 북핵문제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우리 사회의 보수적 목소리만 대변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동안 홍석현 회장이 기회만 있으면 강조해왔던 것이 '열린보수'였다. 그러나 지금 중앙일보의 모습을 보면 열려있다는 느낌이 그다지 들지않는다. 요즈음 중앙일보의 사설과 칼럼을 보면 '통합'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통합'이라는 구호의 등장 빈도가 늘어난다고 해서 '열린보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없는 갈등을 굳이 만들어내고 확대시키는 보도를 내보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통합'의 제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몹시 표리부동한 일이다. 지금 이 시기에 '인터넷 공습'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남북대결을 부추겨 얻어지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홍 회장이 말한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통합자'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는 통합자'를 자임하면서, 정작 자신은 한쪽 편의 목소리만 담고 있다면 중앙일보가 말하는 통합은 한갖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들의 지면에서 '보수'의 목소리는 넘쳐흐르게 하고, 진보나 개혁의 목소리는 담아내지 않고 있다면, 그곳에서 어떻게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앙일보가 '일류신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또 '열린보수'로 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풀어야할 숙제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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