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56회

등록 2004.11.16 07:35수정 2004.11.1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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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이란 게 얼마나 고식적인가?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이미 인간의 몸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벗어난 몸놀림이다.

“..........!”


광무선사의 호목에도 언뜻 이채가 흐른다. 그건 감탄이다. 그와 동시에 어느덧 똑바로 세워진 담천의를 향해 그의 양팔에서 재차 반선수의 금강파천(金剛破天)이 펼쳐졌다. 반선수의 초식 중 가장 웅혼하다는 금강파천이다.

휘리---링----

반선수의 무서움은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태풍이 불어오듯, 산처럼 높은 해일이 몰려오는 듯한 엄청난 경력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번의 반선수는 소리도 허공에서 구슬이 구르는 소리만 날 뿐 바람소리 하나 없다.

그저 한 점의 빈틈없이 그의 몸을 휘감을 때쯤이면 인간으로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경력의 해일 속에서 그 어느 것도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이다.

“..............!”


담천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며 튕기듯 쏟아져 들어오는 경력 속으로 몸을 날렸다. 해일 같은 반선수의 위력에 휩쓸리기보다는 스스로 휩싸여 헤쳐 나가는 것이 옳다.

그의 신형이 일곱 차례나 방향을 틀고 세 번을 회전했다. 동시에 벌려진 양손을 모아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바람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양손바닥을 바깥으로 밀었다. 모든 것을 말아 허공으로 날려버릴 것 같던 반선수의 경력이 소리 없이 갈라져 가고 있었다.


“아미타불......!”

광무선사의 입에서 나직한 불호가 흘러나왔다. 이 또한 감탄이다.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경험이 많지 않을 텐데 그 상황에 적응하는 임기응변 또한 뛰어나다. 허나 자신의 일보 앞까지 짓쳐들고 있는 담천의의 쌍수와 그의 가사는 이미 허공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번의 격돌을 일으켰다.

“헉......!”
“..........!”

쿵---쿵---!
담천의의 몸이 뒤로 주룩 밀려나갔다. 한 치씩 파인 발자국이 다섯 개다. 그의 호흡도 거칠어졌다. 승부는 끝났다. 격돌에서 명백히 다섯 걸음을 물러났으니 담천의의 패배다. 하지만 광무선사의 얼굴엔 놀람과 경탄이 어우러졌다.

“젊은 사람이 예의도 알고, 아미타불. 마음만 먹었다면 노납의 가사도 찢어졌을 것을.”

광무선사는 합장을 하고 담천의에게 가볍게 예를 표했다. 고승의 예란 보기 드물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몸을 약간 비켜서며 포권을 취했다.

“허허. 더 오래 산 덕을 보았을 뿐”

내공의 우위를 뜻하는 것이다. 내공은 수련의 깊이요, 세월이니 어쩔 수 없다. 영약이나 영물의 약효로 덕을 본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오년, 십년의 내공을 쌓을 수는 없다. 다만 영약이나 영물의 약효는 수련의 깊이와 시간의 단축을 가져올 수는 있다. 다른 사람이 삼년 노력해서 이룰 내공을 1년만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뿐만은 아니지요.”

무공의 단련 깊이와 운용, 그리고 경험은 비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담천의는 배우고 익혔으나 깨우치지 못하다가 삼 일전에야 그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아무리 무공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단시일 내에 칠십 평생을 무예만 바쳐온 광무선사에 어찌 비하랴.

광무선사의 얼굴 전체에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담천의의 깨달음은 깊다. 하지만 그 스스로 자인했듯이 내공 뿐 아니라 실전과 경험이 없어 아직 그 본신(本身)의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할 뿐이다. 경험이란 반드시 실전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명문대파의 제자들은 실전경험이 없더라도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다. 그것은 문파 내에서 보고 듣는 간접적인 경험과 제자들 간 어울려 수련하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담천의는 홀로 무공을 익혔고 깨달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광무선사는 이제 확인은 했다.

“시주가 사용한 것이 무당의 것인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연유를 알지 못합니다.”

뿌리 없는 무공이란 없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무공이 아니다. 심신의 단련과 내공법에 따라 운용하면서 조금씩 깨우치고 변화되어 발전하는 게 무공이다. 분명 담천의가 사용한 무공에는 무당의 냄새가 난다. 중원 각파의 무공을 연구한 광무선사는 누구보다 무공의 원류(原流)에 대해서 판별해 낼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문제는 무당의 심법(心法)을 익히지 않고서는 무당의 비전절기를 익히기 어렵다는데 있다. 분명 담천의의 내공법은 무당의 것과 다르다. 진기의 운용이나 호흡이 다르다.

광무선사는 그것에 대해 더 말을 하려다가 이미 장내에 혜각대사가 온 것을 보고는 그 의문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이제는 담천의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허허. 시주는 뜻(意)이 무어라 생각하는가?”
“옳은 마음(正心)입니다.”

“나쁜 뜻(惡意)도 있을 것인데 왜 옳은 마음이라 하는가?”
“나쁜 뜻에는 마음이 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무선무악시심지체(無善無惡是心之體), 유선유악시의지동(有善有惡是意之動)이라 했다. 이는 본래 마음(心)은 선과 악이 없는 것이지만, 뜻(意)으로 인해 선과 악이 있다는 뜻이다. 광무선사는 그의 마음이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뜻을 물었던 것이고 담천의 역시 뜻과 마음이 일체(一體)됨을 답한 것이다.

“아미타불. 그 마음을 잊지 말게.”

이미 담천의의 마음을 알았다. 그는 이 무림에 큰 도움을 줄 사람이다. 광무선사는 마음을 굳혔다. 그와 동시에 담천의의 귀로는 광무대사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의(意)는 허(虛)요, 심(心)은 공(空)이니 발심(發心)은 신허(身虛)요, 전심(前心)은 심공(心空)이라, 알고 있는가?”

선문답이었지만 광무는 담천의에게 화두(話頭)를 주었다. 그가 이제 막 발을 들어선 세계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아직도 미진한 그 무엇이 남아 있는 세계.

칠십평생을 통해 이제 겨우 발을 들여놓고 미지의 세계로 걸어가면서 느낀 심득(心得)이었다. 그것을 왜 외인(外人)인 담천의에게 들려주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의 움직임으로 그는 담천의가 느끼고 있는 의문을 알았다.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납 역시 아직 그 길의 끝을 모른다네. 단지 먼저 발을 들여 놓았을 뿐.”
“선사의 가르침 가슴 속에 새기고 있겠습니다.”

좌중은 어리둥절했다. 분명 광무선사가 무슨 말씀을 내려 준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안 들리고 대답만 한다. 고승의 한마디는 많은 것을 준다. 같이 듣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조금 전부터 와 있던 혜각대사의 아쉬움은 컸다. 천하의 다시없을 무승(武僧)이오 신승인 광무선사다. 사숙이라 따르면서 그때마다 지나가는 말씀에 문득 다가온 깨달음은 그의 번뇌를 걷히게 해 주었다.

아마 사숙의 표정으로 보아 마지막 심득(心得)을 전해 주었는지 모른다. 왜 외인에게 그 심득을 주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심득이라는 것은 전달받을 자의 성취와 단계에 따라 전해주어야 도움이 된다.

굳이 전음을 사용한 것은 이 주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많은 제자들에게 전할 만한 심득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해가 될지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쉬움과 그러한 심득을 받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했다. 그는 나직이 탄식과도 같은 불호를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사숙. 방장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들도 모두 모이신 겐가?”
“그러하옵니다.”
“노납이 너무 게으름을 피웠군. 담시주도 같이 가세.”

광무선사는 자신의 심득을 전해 받고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는 담천의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사제의 연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손자뻘의 무림후배는 그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었다.

소림에서의 첫날. 담천의에게는 광무선가가 준 심득도 심득이려니와 과거에 광노제란 인물에게 패했던 상처와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성취가 조그만 열매를 맺은 하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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