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안진 <다보탑을 줍다>창비
고개 떨구고 가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빠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11쪽, '다보탑을 줍다' 모두
예순 셋의 시인은 왜 고개를 떨구고 길을 걸었을까. 시인의 말마따나 "<""> 속에 들어가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휘젓고" 싶어서, 혹은 "<,>표로 물러앉아서 숨돌리고" 싶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살아봐도 별수 없는 세상에/ 불필요한 나 같아서" 그냥 "<.>로 마감하며 종적 없이 숨어버리고"(나이 계산법) 싶어서였을까.
하여튼 시인은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길을 걷다가 다보탑이 그려진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줍는다. 시인은 그때 국보 20호 다보탑을 줍는 횡재를 했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할 때 갑자기 땅속에서 솟아났다는 그 다보탑을 떠올린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모두 스스로를 낮추면 이 세상은 금세 불국정토가 될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다. 시인에게 주어진 현실은 마치 "쓸모 있는 듯"하면서도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동전 같은 그런 세상이다. 시인의 나이 또한 빨갛게 녹이 슨 10원짜리 동전처럼 예순을 훌쩍 넘겨버렸다. 시인 또한 어찌보면 길바닥에 떨어진 10원짜리 동전처럼 그렇게 살아오다가 그렇게 사라질 것만 같다.
"지혜자 솔로몬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전도서>(1장 9~10절)에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씌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새것에 목마르다, 새롭게 거듭나서 헌것을 새로운 시로 새롭게 재탄생시키고 싶다. 계통 발생과 개체 발생에서 완전 절연된 돌연변이 신생종 신인류가 되어, 새로운 시를 쓰고 싶다."-'시인의 말' 몇 토막
지난 2000년 11월, <봄비 한 주머니>를 펴냈던 시인 유안진(63)이 4년만에 열두 번째 시집 <다보탑을 줍다>(창비)를 펴냈다.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얼굴을 내민 지 올해로 꼭 40년째다.
그래서일까. 유안진의 이번 시집에서는 오래 묵은 장맛처럼 구수한 내음이 감돈다. 아니, 오랜 발효과정을 거쳐 마침내 새로운 맛으로 거듭나는 그런 시들이 빼곡이 실려 있다. 마치 오래 전에 누군가 잃어버린 그 10원짜리 녹슨 동전을 주워 다보탑을 주웠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멋진 뒤집기 같은 그런 시들 말이다.
| | | 시인 유안진은 누구인가? | | | 헌것을 새것으로 빚어내는 시인 | | | |
| | ▲ 시인 유안진 | ⓒ창비 | | "그는 밝고 빛나는 눈을 가졌다. 가령 비가 멎는 소리에서 소멸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보며, 떨어진 한잎 동전에서 사람살이의 보편적 진실을 깨닫는다."-신경림(시인)
시인 유안진(서울대 아동학부 교수)은 194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달하> <절망시편> <물로 바람으로> <그리스도, 옛애인> <달빛에 젖은 가락> <날개옷> <월령가 쑥대머리> <영원한 느낌표>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누이> <봄비 한 주머니>가 있다.
수필집으로는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축복을 웃도는 것>이 있으며,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땡삐> 등을 펴냈다.
<한국펜문학상>(1996) <정지용문학상>(1998) <월탄문학상>(2000) 받음.
/ 이종찬 기자 | | | | |
시인 유안진은 "모든 형식 모든 그릇을 다 만들어 본, 그것을 위해서는 그 그릇밖엔 없는 것 같은, 어떤 이즘에 갇히지도 매이지도 않는 무한 자유롭고 엉뚱한 시"(시인의 말)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언어로써 언어를 파괴하고 싶었고, 파괴되는 언어가 되어서는 안되는 나만의 시" 말이다.
시인은 그런 '나만의 시'를 위해 "우리말을 늘이고, 비틀고, 구겨 뭉치고, 쥐어짜고, 두들겨패고, 지지고, 볶아대고, 달이고, 졸이고, 우려낸 언어예술품을 빚어내고 싶었"다고 강조한다. 이어 그렇게 태어난 시들이 설사 왜곡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는 표현의 왜곡이 있기를 바라며, 부디 이 시들이 "새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였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네 가슴도 먹장인 줄 미처 몰랐구나
무골호인(無骨好人) 너도 오죽했으면
꼴리고 뒤틀리던 오장육부가 썩어 문드러진
검은 피 한 주머니만 껴안고 살다 잡혔으랴
바닷속 거기도 세상인 바에야
왜 아니 먹장가슴이었겠느냐
-14쪽, '물오징어를 다듬다가' 몇 토막
어느날, 시인은 찬거리를 만들기 위해 물오징어를 다듬는다. 그 물오징어는 뼈도 없고 "비늘옷 한 벌 없는 알몸"으로 태어나 "남의 옷 한가지 탐낸 적 없이 맨몸"으로 살아온 시인의 모습과 꼭 닮았다. 근데, 내장을 꺼내기 위해 배를 따고 보니 뱃속에는 시꺼먼 먹물이 들어 있다. 마치 모진 세월에 "검은 피 한주머니"만 꼬옥 껴안고 살아온 시인처럼.
시인은 그런 물오징어의 먹장가슴을 바라보며 "나도 먹장가슴이란다/ 연체동물이란다/ 간도 쓸개도 배알도 뼛골마저도 다 빼어주고/ 목숨 하나 가까스로 부지해왔단다" 라고 나직이 읊는다. 그리고 시인 또한 물오징어처럼 "목고개 오그려 쪼그려/ 눈알조차 숨겨 감추고/ 눈먼 듯이, 귀먹은 듯이, 입도 없는 벙어린 듯이/ 이 눈치 저 코치"로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근데, 마치 시인의 분신 같은 그런 물오징어를 시인 스스로 다듬고 있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시인은 다시 읊조린다. "너의 추위 너의 서러움을 나도 안다, 알고 있는 우리끼리 이렇게 마주친 희극적 비극의 비극적 우연도, 어느 생애 지어 쌓은 죄갚음이라 할 건가"라고.
밸이 뒤틀릴 때마다 순대가 생각난다
밸 꼴리는 세상에서
구절양장(九折羊腸) 인생을 살아내자면
꼴리는 밸을 어찌 저찌 대처했을 돼지가 스승인 듯
순댓집은 늘 북적대는 사람들로
돼지처럼 살아낼 재간을 배우려는 이들로
나도 순서를 기다려
한 그릇씩 먹고 나면 뒤틀린 밸을 펴는
신통술이라도 깨우쳤다는 듯이 웃고들 나간다
순대야말로 먹는 경전인가.
-82쪽, '순대도 경전인가' 모두
시인은 이 세상의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순대를 먹으러 간다. 순댓집에는 시인처럼 뒤틀린 속을 달래기 위해 순대를 먹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아니꼽고 더럽고 속 터지는 세상에서 "꼴리는 밸을 어찌 저찌 대처했을 돼지가 스승"인 것처럼.
시인 또한 이리저리 마구 꼬이고 뒤틀린 뱃속에 순대를 하나둘 채운다. 이내 마구 뒤틀리던 뱃속이 순대처럼 스르르 펴진다. 마치 배배 꼬인 돼지의 창자 속을 터질듯이 꼭꼭 채운 순대가 신통술을 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순대가 먹는 경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뱃속도 마음도 그지없이 편안하기만 하다.
볼 장 다 본 사람이
왠지 볼 장 덜 본 것만 같아
기웃거린 병원 대기실
아직도 내게 팔아야 할 것과 사야 할 게 있는가
왜 그만 발길 돌이키지 못하느냐고 자책하다가
실려가는 중환자와 마주쳤다
아직도 모르느냐
장터 아닌 세상이 어디 있으며
장날 아닌 어느 날이 있느냐
가는 날이 장날이고 가는 곳마다 장터인데
아무리 오래 살아도 볼 장 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외마디 그의 비명이 고막을 때린다
-89쪽, '장날 장터에서' 모두
그렇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치고 "볼 장 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순 셋의 시인 또한 이제 이 세상살이에서 볼 장 거의 다 본 것으로 생각했다. 근데 갑자기 몸이 아프다. 몸이 시름시름 아파오자 아직도 이 세상살이에서 "볼 장 덜 본 것"만 같다. 그때부터 시인은 병원 대기실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어쩐지 안쓰럽기만 하다. 그냥 돌아갈까, 자책하다가 문득 병원 대기실에서 수술실로 실려가는 중환자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그 비명소리는 마치 "장터 아닌 세상이 어디 있으며/ 장날 아닌 어느 날이 있느냐"라며 시인의 속내를 꼬집는 것만 같다. 하루하루가 장날이고 가는 곳이 곧 장터라며.
시인 유안진의 열두 번째 시집 <다보탑을 줍다>는 예순의 나이에 바라보는 이 세상살이에 대한 속내 깊은 회한과 그 회한이 올올이 빚어낸 찬란한 사리 같은 시들로 가득하다. "뽑아버릴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제 몸의 가시가 싫은 가시나무가 마침내 "가시나무만의 빛깔과 모양과 향기의 꽃"(며느리)을 아름답게 피워내는 것처럼.
다보탑을 줍다
유안진 지음,
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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