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용마기, 백학기, 백택기.한성희
대여를 비롯해 명기와 부장품을 실은 가마도 여럿이지만 깃발을 들고 가는 이도 엄청 많다. 홍문대기, 군왕청세기, 천하태평기, 주작기, 청룡기, 백호기, 황룡기, 정축기 등등 헤아릴 수 없다.
국장행렬에는 5천명에서 1만명까지 장지로 따라간다. 조선의 인구가 많아야 6백만명에서 5백만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고, 수많은 깃발(깃발과 은작자 은월부 등을 든 사람은 옷과 모자가 각각 다르다)과 대여를 비롯한 가마들과 장식한 말들, 방울을 쩔렁대며, 왕과 문무백관, 궁녀와 내시 등의 행렬을 상상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어두운 명계의 궁전이라 하여 광(무덤)을 현궁(玄宮)이라 한다. 산릉 부역에 동원된 백성은 군사라 하고 보름이나 한 달 치의 식량을 짊어지고 가서 일을 했다.
예종의 창릉 산릉부역에 동원된 군사가 7000명이었고, 세종의 천장에 부역꾼 5000명과 공장(工匠) 150명, 쌀 1323석 5되, 소금 41석 3두(斗)가 소요됐다고 기록은 전한다.
1674년 5월 28일 발인한 17대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장례에는 광나루에서 한강 수로를 이용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까지 가는 도중 2박을 한다. 이때 쓰인 배가 150척이고 배를 모는 선군(船軍)이 3690명이었다.
6월4일 장사지냈는데 산역은 조선 팔도의 승을 징발해 3200명이 보름분 식량을 지참하고 일했다. 이때 산역 인원이 적은 것은 효종의 능이 이미 조성된 뒤라 정자각이나 비각, 재실 등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승을 산릉 부역에 동원하는 것은 농사짓는 철에 백성 동원을 하기 어려울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