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목리 굴은 단 맛이 난다

[태안반도 끝머리 개목마을 2]

등록 2004.12.06 14:00수정 2004.12.0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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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목리의 어민들은 일찍부터 '독살'이라 부르는 전통어법으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해 왔으며 이 방법을 30여 년 전까지 사용하였다. 개목리에 알려진 독살만 25개라고 하니 아마 전국에서 독살이 가장 많은 마을일 것이다.


인근 칠산바다와 연평도 일대에서 조기잡이로 돈을 벌었다지만 그것이야 배가 있는 선주나 객주 이야기고 1960년대 말까지 개목리 주민들은 그저 마지 못해 살았다. 그러다 1970년대 큰 마을과 작은 마을을 잇는 방조제가 생겨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굴양식이 시작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일부 김양식을 하기도 하였지만 주민들의 생활을 바꾼 것은 굴양식이었다. 잔나무 가지를 꽂아서 하는 '송하식'에서 '지주식'으로, 지주식에서 '부류식'으로 변화한 개목리 굴양식은 말 그대로 굴양식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마을어장에서 해삼과 전복을 채취하거나 낚시배를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다.

최근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보면 1시간 거리로 육상교통이 편리해졌지만 주민들이 일을 보러 대전이나 유성에 나가려면 버스를 몇 시간 동안 타야 한다.

a 개목리 마을

개목리 마을 ⓒ 김준


a 전통어법 '독살'

전통어법 '독살' ⓒ 김준


a 흔적 만 남은 송하식 굴양식

흔적 만 남은 송하식 굴양식 ⓒ 김준


a 지주식 굴양식

지주식 굴양식 ⓒ 김준


a 깊은 곳에 설치된 굴양식

깊은 곳에 설치된 굴양식 ⓒ 김준

개목리 굴양식사

개목리 주민들이 굴양식을 하던 초기에는 갯벌에 돌을 집어넣어(투석식이라고 부른다) 직접 돌에 붙은 굴을 조새를 이용해 채취했다. 이때는 마을 바로 앞 갯벌에서 소규모로 양식했지만 가격은 지금과 차이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재미가 괜찮았다.


그러다 30여 년 전 주민 중 누군가 나뭇가지를 갯벌에 꼽아 굴양식을 했고 투석식보다 많은 굴이 붙자 모든 주민들이 투석식보다 약간 깊은 곳에 소나무나 참나무 잔가지를 베어 갯벌에 꼽아 양식을 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이 방법을 '송하식'이라고 부른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갯벌이 개별 생산 공간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으로 보인다. 송하식은 많은 주민들이 능력껏 굴양식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조류의 흐름을 느리게 하고 토사를 쌓이게 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20여 년 전부터는 말목을 박아서 줄을 늘어뜨리고 조개껍질에 포자를 붙여 양식을 하는 '지주식' 굴양식이 등장했으며 최근에는 스티로폼을 부표로 이용한 '부류식' 양식을 병행하고 있다.

이렇게 굴양식 기술이 발달하면서 양식장은 점점 깊은 바다로 확장했으며 면적도 대규모가 되었다. 지금 개목리 어촌계는 20ha 굴양식장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양식장은 어촌계가 직접 관할한다. 그러나 어촌계가 주민들에게 양식장을 분할하고 행사료를 받고 있지만 이곳은 일찍부터 각자 양식장을 만들어 이용했기 때문에 허가는 어촌계에서 냈지만 개인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이곳 주민 120여 호 중 굴양식을 하는 어민은 100여 호에 이르며 200칸(1칸이 3*4m) 정도 양식하는 사람이 3-4명, 100칸은 20여 명, 나머지는 20-40칸 정도 양식을 하고 있다. 양식장은 외지인들은 이용할 수 없으며 주민들 중에서도 새로 시작하려면 기존 하는 사람에게서 권리를 사야만 가능하다.

a 담치껍질에 채묘 중인 시설

담치껍질에 채묘 중인 시설 ⓒ 김준


a 개목리에는 7-8명의 낙지잡이꾼들이 있다.

개목리에는 7-8명의 낙지잡이꾼들이 있다. ⓒ 김준

개목리 굴은 단 맛이 난다

개목리 어민들은 충무 등지에서 담치껍질을 엮은 줄을 사다 직접 포자를 붙인다. 10월에 갯벌에서 포자를 붙여서 설 전에 양식장에 넣게 되면 그 해 가을철부터 굴을 깔 수 있을 정도로 자라게 된다. 2년 정도 자란 것이 상품가치가 높으며 너무 큰 것은 소비자들이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 두지는 않는다.

충남 위쪽으로 서울까지 대부분 굴은 이곳에서 공급하고 있다. 아래쪽은 전라남도에서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굴양식은 가을철부터 3월까지 한다.

사리 때를 제외하고 보통 큰 페인트 통 크기(20kg)로 50여 개가 이곳에서 출하된다. 작년에는 중개상 3-4명이 수집해 갔지만 올해는 파도리에서 세일수산을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직접 트럭을 운전하고 와서 걷어가고 있다.

"매일 걷어가요. 전라도만 빼고 위쪽은 다 가요. 전라도는 싸잖아요. 여기 것 찾는 사람만 찾아요. 얼마에 걷어가는 이야기는 못하죠. 전라도 굴은 크잖아요. 여기 굴은 작아요. 여기 굴이 맛있어요. 잡솨 보세요. 전라도 것보다 맛있어요. 여기 굴은 달아요.

하루에 50통 정도, 매일 그렇게 나와요. 사리 때니까 이 정도 나오제(적게). 사리 때는 전복 해삼 잡고, 조금 때는 까고 앉아 있으니까 많이 나와요. 사리 때는 10개 정도 조금 때는 50개 나와요. 바로 바로 현금을 줘요. 많이 까는 사람은 한 25kg 정도 까니까 10만원은 해요."

소매로 판매하는 경우도 있는 데 수집상에게 거래하는 가격보다 1000원정도 더 받는다. 이외에도 단골이 생기면서 택배주문을 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에서 1시간 거리기 때문에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직접 내려와서 바다도 구경하고 사가기도 한다.

a 소매로 팔 때는 깐 굴을 잘 헹구어 준다.

소매로 팔 때는 깐 굴을 잘 헹구어 준다. ⓒ 김준


a 개목리의 굴을 모두 걷어가는 파도리 아줌마, 마을에서는 유명인이다.

개목리의 굴을 모두 걷어가는 파도리 아줌마, 마을에서는 유명인이다. ⓒ 김준


a 굴은 곧 쓸 수 있는 돈이된다.

굴은 곧 쓸 수 있는 돈이된다. ⓒ 김준

개목리 굴 양식은 수하식양식법이다. 이는 담치껍질에 채묘 한 굴을 물 아래 줄을 매달아 1-2년 기르는 방법이다. 갯벌이 발달한 서남해 해역에서 많이 이용하는 투석식은 최근 갯벌이 쌓이면서 개목리처럼 수하식으로 바뀌고 있다.

투석식양식법은 주로 조새라는 어구를 이용해 부녀자들이 채취를 하는 부업 성격이 강하며 마을 공동어장에서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규제가 강하다. 하지만 수하식양식법은 시장지향성 양식으로 기계로 채취하기도 한다. 즉, 전업적이며 기업적이다. 개목리는 기업적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전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굴양식의 유래와 역사

굴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어지> <자산어보>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원도를 제외한 7도 토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자산어보>에는 굴을 모려(牡礪)라고 칭하고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는 폼이 구름조각 같으며 껍질은 매우 두꺼워 종이를 겹겹이 발라 놓은 것 같다고 써있다. <본초강목>에서는 여합(蠣蛤)이라 칭하기도 하며, 간석지 바닥이나 바위에 붙어 있는 모양이 돌에 핀 꽃과 같아서 석화(石花)라고 칭하기도 한다.

굴은 김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으로 여러 패총에서 굴 껍질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도 식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말 광양만 섬진강 입구에서 굴을 양식하였다. 이후 식민지 시기 함경남도 영흥만과 평안북도 다사도 연안에서 수면 아래서 양식을 하였고, 전라남도 해창만과 섬진강 입구에서는 간사지를 이용하여 바닥양식 혹은 투석식 양식을 하였다.

이후 경상남도 가덕만과 진교만 부근에서 집약적으로 양식을 했다. 최근에도 이용하는 수하식 양식법은 식민지 시대 후기에 함경남도 영흥만에서 보급되었다.

최근 무분별한 갯벌파괴와 간척사업 그리고 오염으로 굴 양식장이 축소되고 있으며 전라남도 고흥 나로도 해역, 여수 가막만 해역, 경상남도 남해군 창산해역, 고성의 자란-사랑해역, 거제-한산만 해역에서 대규모로 수하식 양식을 하고 있다. / 김준
굴이 가장 맛이 있는 시기는 겨울철로 김장철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는 수산물을 날 것으로 먹지 않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굴만은 예외적으로 날 것으로 먹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발자크는 한번에 굴 12타(144개)를 먹었고, 독일의 수상 비스 마르크는 175개를 먹었다고 한다.

또 줄리어스 시저가 대군을 이끌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원정을 한 이유 중 하나가 테임스 강 하구에서 나는 굴의 깊은 맛에 빠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나폴레옹 1세도 전쟁터에서도 세 끼 식사에 가능한 한 굴을 먹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를 보면 동양보다 서양인들이 굴을 더 즐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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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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