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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겨울이 왔습니다. 시골집에다 늙은 엄니를 ‘유기한’ 죄 많은 자식들 중 막내인 저는 무지막지한 죄의식을 씻기 위해 부끄러운 맘으로 올해도 엄니를 찾았습니다.
‘곰(고기나 생선을 진한 국물이 나오도록 푹 삶은 국)’을 끓이는 것은 연세 드신 분들의 겨울나기 준비의 하나라고 합니다.
작년에는 도축을 직접 하는 김해에서 곰거리를 샀는데, 양이 많기는 했지만 노린내가 나서 드시기가 고약하였다는 엄니 말씀을 듣고서는 올해는 동네 정육점 아저씨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구입했습니다.
큰 황소족발이었는데 국산 한우가 맞다는 표시로 발톱 뒷부분에 노란 털을 몇 가닥 살려 놓았습니다. 아내는 한우를 깨끗하게 씻어서 밤새 찬물에 담가 피를 빼 놓았습니다.
곰국을 끓이면서
아침 10시경에 시골집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큰 장작나무들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가마솥을 깨끗이 씻고는 곰거리를 솥에 안쳤습니다. 이 솥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으니 아마 50년 이상은 되었을 겁니다. 솥에 3분의 2쯤 물을 채우고 불을 지폈습니다. 정육점 아주머니로부터 '센 불에 끓여야 제 맛이 난다'는 말을 들은 터라 장작 여섯 개 가량을 모두 넣고서는 부엌 앞에 앉았습니다.
불이 붙고 따스한 기운이 몸 전체로 번졌습니다. 옛날 우리 여인네들은 이 더운 기운이 아랫도리를 덥혀서인지 부인병이 거의 없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그 곳을 말릴 수가 없으니 그렇게들 찜질방을 찾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실없이 웃었습니다.
열 여섯에 시집와서 위로 일곱을 낳고 마흔 둘에 이 막내아들을 낳으신 울 엄니가 이제는 여든 여섯이 되셨습니다. 기억력도 점차 희미해지고 다리도 더 아파하는 것을 보니 인생을 산다는 것이 자기 몸을 조금씩 태우는 저 장작개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태움으로 내가 나고, 내 아들이 태어났으며, 나도 이제 저 어린것들에게 나를 사르고 있나봅니다.
초등학교 때 장에다 고사리를 팔고 엄니와 집에 오면서 길가에 세워진 어떤 비각에 대해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엄니, 저 비석이 우째 저기 서게 되었십니꺼?"
"야~야, 그건 말이다. 이전에 이 동네에 아조 가난한 집이 있었능기라. 남편은 일본에 징용가고 혼자서 늙은 시아바씨(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내게는 아지메뻘이 되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 아지메가 새대기였을 적에 너무 먹을 기 없어서 시아바씨한테 밥을 못해 주능기 항상 죄스러웠능기라.
그런데 운제 보리밥을 해다 주었제. 시아바씨는 맛있게 묵었는데… 며느리는 눈물만 흘렸능기라. '야~야, 아가, 니 와 울고 그라노' 시아바씨가 물으니 며느리는 울면서 대답했제. '아버님, 지송합니더. 땟거리 걱정을 함시로 길을 걸어가는데 개똥이 있능기라예, 그런데 그 안에 보리쌀 낱알들이 보여서 그것을 씰어다가 밥을 했습니더. 제가 먼저 묵어보니까 냄새는 안 나는 거 같아서 아버님께 올렸습니다. 정말 지송합니다.'
그것 말고도 그 아지메는 혼자 사는 시아바씨한테 참 잘했제. 그런 이야기가 알려져서 나라에서 효부비석을 세워 주었능기라."
그러고 보니 제가 초등학교 때 할머니가 이웃할머니들과 나누던 얘기를 들은 것이 생각납니다.
"운제 보리숭년 든 겨울날, 내가 갑자기 괴기 비린내가 생각 나능기라, 그래서 내가 우리 며늘아한테 '며눌아, 내가 괴기가 좀 묵고 싶다' 했제.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성수에미는 소쿠리를 들고 보또랑에 갔능가벼. 찬 겨울에 무슨 미꾸라지가 있겄노.
그런데 성수에미는 미꾸라지 두세 마리하고 세비(새우)를 또 여남은 마리 잡아와서는 무시(무)를 넣고 국을 끓였제. 나는 이웃 동시(동서)들을 불러다가 같이 맛있게 먹었는데, 그 날 밤에 며느리 발을 보이 동상이 걸려서 퉁퉁 붓어 있능기라. 그래서 내가 그 날 밤새 내 입을 울매나 쥐어박았던지…."
이제 솥에 김이 서립니다. 다시 장작을 두어 개 더 넣습니다. 김은 점차 세어지면서 엉겨서는 눈물이 됩니다. 눈물은 솥의 열기로 말라붙지만 더 많은 물기가 배어나옵니다. 이제 김은 더 센 기운으로 솥뚜껑을 밀어붙입니다.
솥뚜껑은 더 견디지 못하고 "휘이휭" 아우성을 내어 지릅니다. 그 기운에 무쇠 솥뚜껑이 들썩거립니다. 장작 두어 개를 빼내어서 물을 질러 불을 끕니다. 매캐한 연기가 아내에게 닿았나 봅니다.
"아, 매워."
마누라는 비명을 지르면서 연신 콜록거립니다.
"연아!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소를 키웠단다. 봄과 여름에는 소를 야산에 몰고 가서 풀을 뜯어 먹여 키웠지만 겨울에는 소죽을 끓여 주었지. 소죽솥은 이 솥보다 아마 다섯 배는 컸을 거야.
그런데 그 땔감이 생솔가지였어. 젖은 생솔가지에는 불이 붙지 않을 것 같지? 처음 불을 지필 때는 어렵지만 한 번 불이 붙고 나면 그 맹렬한 기운이 참 장했지. 온 집안이 연기로 뒤덮였지만 나는 그 연기가 너무 고소했단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유선라디오가 들어 왔는데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면서 소죽을 끓였는데, 그 때 재속에 고구마를 두어 개 묻어 두었다가 뜨뜻한 아랫목에서 까먹는 맛이라니, 아마 우리 마누라는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할 수 없을 걸."
아내는 솥뚜껑을 열고서는 국물을 퍼냅니다. 물은 거의 절반 이상이나 졸아 있습니다. 다시 뼈다귀를 넣고 장작을 많이 넣습니다. 동사에 놀러 가셨던 엄니가 절룩거리면서 들어옵니다.
"너거 왔나? 왔으모 전화하지. 점섬은 먹었나? 아아들은 와 안 델꼬 왔노?"
"그기 뭐꼬. 그런 거를 말라꼬 사 왔노?"
아내가 엄니를 모시고 방에 들어가니 부엌에는 이제 나 홀로 남았습니다. 연초에 나는 해맞이를 하면서 몇가지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 첫째가 '울 엄니 건강하게 올 한해를 버티게 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두번째는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한 해를 보내는 것’, 셋째는 '우리 딸 공부 잘 하고, 우리아들 한자 4급 붙게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거의 소망대로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다시 김이 납니다. 눈물이 납니다. 솥은 뜨거우면 스스로 제 안에 있던 물기를 내어 몸을 식힙니다. 김이나 눈물이 날 때까지는 솥 안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밖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솥을 가만히 열어 보면 안에 있는 물들은 후둑후둑 무리를 지어 달리다가 때로는 서로 맞서다가 부서지고, 잠깐 동안은 어우러져 한 쪽 방향으로 내닫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것이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오는 것이 김이 아닌가요. 그것은 성숙을 위해 갈등하고 아파하다가 마침내 조화를 이뤄내는 우리네 인간사와 닮아있습니다.
불길을 줄이고 아내는 또 곰국을 퍼냅니다. 다시 불을 지피고 세 번째 곰국을 끓여내기 위해 장작불을 넣습니다. 다시 김이 나고, 눈물이 나고, 솥이 울고, 불길을 줄입니다. 이번 국물에다가 아까 퍼 둔 첫 번째, 두 번째 국을 합해서 좀 더 진하게 졸입니다.
후기
장작 불빛이 사위어 갑니다. 저는 엄니가 여든 일곱을 넘기고, 여든 여덟을 넘기고… 더 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점점 늙다가 모든 신체 조직이 다 스러졌을 때, 재마저도 채 남지 않는 저 장작개비처럼 그렇게 아프지 않고 고통 없이 가시기를 더 소망합니다.
엄니는 막내형이 사온 고등어 두어 토막을 가져왔습니다. 석쇠에다 얹어서 숯불에 올립니다. 고기가 지글지글 익습니다.
“야~야, 참 맛나다. 니도 많이 묵어라.”
살코기를 발라서 엄니에게 건네는 막내며느리에게 엄니가 고등어 한 점을 건네줍니다.
곰국은 거의 한 양동이가 되었습니다. 뼈다귀를 보니 물렁살들은 거의 흐물흐물해져 있습니다. 아직 뼈에 붙은 연한 살들을 조심조심 발라냅니다. 엄니와 나는 고기를 소금에 찍어서 먹어봅니다. 참 구수하고 맛있습니다.
아내는 곰국과 살코기를 여러 비닐봉지에다 고루 담습니다. 엄니가 드시게 편하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엄니는 애들 먹이라며 두어 봉지를 아내에게 전합니다. 우린 아무 말 없이 그걸 받습니다.
해가 진 지 이미 한참입니다. 아내와 나는 어둠을 가르며 점심과 저녁밥을 굶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이 있는 네모진 아파트를 향해 차를 달립니다.
열어둔 차창 사이로 전해지는 고향 공기 냄새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좋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습니다. 아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둠살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라며 비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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