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정립회관 점거농성 174일…보름의 단식은 끝났으나

등록 2004.12.13 13:12수정 2004.12.1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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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간의 목숨 건 단식투쟁은 끝났다. 누렇게 뜬 얼굴. 바짝 바짝 타들어 가던 입술. 더욱 깡 말라버린 몸. 전동휠체어를 잡은 손의 힘마저 빠져 버릴 즈음, 그렇게도 만나주지 않던 한국소아마비협회 이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9일 단식농성장을 방문한 이익섭 이사는 "단식을 풀면 대책을 조속히 강구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침침해진 눈으로, 벨트로 몸을 고정시킨 채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단식농성단은 이 이사의 말을 듣고 일단 단식을 중단하기로 했다. 혈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오로지 정립회관의 민주적 운영을 염원하며 단식농성을 감행했던 5명의 목숨 건 투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들은 근육경직이 심해져 일상적인 생활도 힘들었던 고통의 시간이 이제 '희망의 시간'으로, 새벽녘이면 텅 빈 뱃속까지 얼게 만들었던 농성장의 냉기도 '승리의 뜨거운 열기'로 바뀔 날을 기대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네 명은 '장애인계 최대단식 투쟁'이라는 역사를 깊게 새겨놓았다.

승리를 위한 거대한 발걸음

a 단식 마지막 날인 15일째인 최진영씨가 계속되는 단식으로 침침해진 눈을 부비고 있다.

단식 마지막 날인 15일째인 최진영씨가 계속되는 단식으로 침침해진 눈을 부비고 있다. ⓒ 정현주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 최진영 활동보조 팀장(뇌병변장애 1급), 정립회관민주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이원교 공동대표(뇌병변장애 1급), 서울경인사회복지노동조합 정립지부 김재원 지부장, 서울경인사회복지노동조합 정립지부 윤지영 조직부장, 한국보치아연합회 한진구 공동대표(뇌변변장애 1급) 등 5명은 지난 11월 25일부터 정립회관 이완수 관장의 퇴임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 '승리'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정립회관 곳곳에 나붙은 대자보, 단식투쟁일지, 투쟁사 등은 이들에게 단식투쟁을 지탱해준 의지의 원천이었다.

고비도 없지 않았다. 한진구 대표는 단식 12일째인 지난 6일 감기몸살에 탈진상태로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아찔한 순간을 맞았던 것.


최진영 팀장은 비위가 약해져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단식 중 탈진을 막기 위해 먹는 물과 소금 섭취마저 끊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평소에도 40kg이 안 되는 최 팀장의 마른 몸은 더욱 수척해진 상태에 이르렀다.

이원교 공동대표는 지난 4일 어머니의 생신잔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 대표는 "단식으로 배가 고프고 몸에 이상이 오는 건 약간의 의지로 이길 수 있지만 나 때문에 아내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속상해 하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이 대표는 "장애인 자립생활의 메카라고 하는 정립회관이므로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는데 문제가 있는 이완수 관장 퇴임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노조원 징계, 농성장 폭력 침탈 등 있을 수 없는 일이 계속 발생하는 등 실망이 커 최후의 방법으로 단식을 택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우리의 단식이 우물 안 파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증장애인으로서 우리의 뜻을 밝히고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단식 뿐"이었다며 "조속히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이익섭 이사의 약속을 믿고 단식을 풀지만 우리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허무맹랑한 유언비어 '비수'

비장애인인 김재원 노조 지부장과 윤지영 조직부장 또한 몸의 기능이 떨어진 상태였다. 김 지부장의 경우 각막에 물이 차는 증상으로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성자들이 악화된 몸의 상태보다 더욱 참기 힘들었던 것은 단식을 둘러싼 유언비어.

'단식 중에 따로 음식을 먹고 있는 것 다 안다', '단식자들이 음식을 먹는 걸 봤다' 따위의 허무맹랑한 얘기가 인터넷 상에서 떠돌고 있는 걸 볼 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

소아마비협회 이사진 해결책 제시 '주시'

김 지부장은 "단식을 푼다고 해서 우리의 투쟁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소아마비협회 이사회의 움직임을 지켜보겠다. 뚜렷한 대책마련이 없을 때에는 또 다른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정립회관 점거농성을 시작한 지 174여일. 보름동안의 목숨 건 단식투쟁은 중단했지만 이완수 관장 퇴진 등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이들의 투쟁의지는 더욱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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