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보살 조각을 하고 있는 김광열 명장임성식
김 명장은 “내가 나무 조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어릴 적 강원도 두메산골 화전민의 후손 때문일 것”이라며 “통나무집에서, 나무로 된 도구들을 갖고 놀았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고, 아버지가 나무로 연장을 만드시는 것을 보며 컸다”고 회고했다.
김 명장은 69년 초등학교 졸업 후 경기도 양평군 소재 청운중학교 부설 직업중학교(목각)에서 1년 과정을 수료했다. 오전에는 학과 공부를, 오후에는 목각실습을 하였다. 이곳에서 당대 최고 목각권위자인 이석호 스승의 제자가 되는 행운을 갖게 돼 남다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71년 가을 이석호 스승이 다른 조각가의 공방으로 홀연 떠나난 뒤 예술작품의 상품화에 회의를 느끼고, 5년간 속리산으로 들어가 마음속에 해보고 싶은 모든 작품을 해보았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낄 정도로 불상조각에 매진했다.
스무 살 되던 75년도에는 늘 공경해 오던 불미전에 십일면관음보살상을출품하여 장려상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이듬해 인생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76년 10월 17일 불미전 종정상(대상)을 받고 감격에 겨워 한동안 나무를 붙잡고 울기도 하였다.
대상을 타보려는 큰 욕심을 내어 몇 개월에 걸쳐 사천왕상 초안을 마련하였다. 사천왕은 도리천에서 제석천 아래 사방을 수호하는 위엄과 장엄함이 불교 미술 중 가장 뛰어난 상이다.
당시는 목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기에는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목각수준이 너무 낮아 석고상이 최고상을 받을 때 목각은 장려상이 고작이었다.
사천왕상이 워낙 대작이라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재료비도 문제지만 3톤이 되는 육중한 원목을 다루기가 여간 고된 작업이 아니었다. 가산을 다 털고, 빚도 많이 지고 겨우겨우 작품을 완성해 출품했는데 경험이 없는 김 명장에게는 큰 모험이었다.
대상 수상 후 세상에 조금씩 이름이 알려져서 주문도 들어오고 그 동안 진 빚도 갚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89년도에 공주시 계룡면에 정착했다. 돌로 조각을 해 보고 싶은 욕심으로 돌조각을 했으나, 목조각에서 석조각으로 전환이 어려워 10여 년 만에 겨우 조그마한 돌 하나로 조각을 하게 되었다.
재질이 바뀌자 감각이양이 잘 안 돼 애로를 겪기도 했었고, 나무를 다루던 자는 나무만으로 작품을 해야 한다는 주위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굳은 신념으로 계속 돌을 쪼았다.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다. 그에게 많은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한 스님께서 국내 최대 9층 석탑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큰 불사는 경험이 없는 자에게는 잘 주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동안 기회가 오지 않았다.
몇 달을 전국을 돌며 작품구상에 들어갔다. 하루하루 새로운 구상이 보태어지고 빠지니, 매일 수정 초안만 쌓이는 게 아닌가. 떠오른 착상을 완전한 초안을 만들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명언이 그때처럼 마음속 깊이 와 닿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