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이 빌게이츠를 만든다

[인터뷰]마이크로소프트 수석연구원 김정한 박사

등록 2004.12.16 12:21수정 2004.12.1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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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8개국 지사에 정식 직원만 5만여 명. 매출액 283억7천만 달러에 순이익 78억3천만 달러(2002년 6월 기준). 1975년 조그만 창고에서 시작한 마이크로소프트(MS)는 거침없는 성공 신화를 그리며 세계 최고의 IT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거대 공룡의 두뇌 역할을 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에서 수학 이론가로 이름을 날리는 김정한 박사가 국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난 9월과 11월 한국을 찾았다.

리서치와 디벨럽먼트의 차이?

"한국은 소프트웨어 기술이 발전했지만 논리적인 사고가 부족합니다. 논리가 빠진 상태에서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1등이 되려면 전산수학을 통한 논리적 이론이 받쳐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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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일

김 박사가 서울대학교에서 가을 학기에 가르친 전산수학 강의는 1주일에 75분씩 2시간 진행되었다. 전산이나 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기초 과학의 이론적 체질을 심어주는 게 이 수업의 목표였다. 최근 일고 있는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해 그는 "기초 과학에 대한 풍부한 이론과 논리적인 사고 없이는 미래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론을 가르치는 것은 국어를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국어를 알아야 시든 소설이든 쓸 테니까요. 물론 국어를 배우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르지만 어느 수준에 이르면 기초가 탄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실력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당장 상품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론을 쌓자는 그의 주장이 한가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기초 과학을 통한 논리적 사고는 사회 전반에 기술적 뿌리를 단단히 심는다. 미국, 일본 등 세계 강국이 기본에 충실한 이유는 그것이 일류가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당장 성과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선진 기술'의 열쇠가 바로 기초 과학이자 이론이자 논리적인 사고다.

"그런 점에서 국내 기업들이 R&D에 투자를 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아직은 R과 D조차 구분하지 못합니다. 리서치(research)는 시간이 길고, 디벨럽먼트(development)는 짧은 연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벨럽먼트는 '된다는 믿음'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고, 리서치는 확신 없이 일단 부딪혀보는 것입니다. 국내 기업들이 말하는 R&D는 사실 디벨럽먼트가 대부분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논리 길러

디벨럽먼트 이상으로 리서치가 중요한 것은 기업의 위험 요소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주제를 잡아 연구하고 결론을 내는 과정이 더디긴 하지만 리서처(researcher)가 머리 속으로 계산하므로 실패해도 손해가 없다. 단순히 제품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미래 기술을 연구하므로 결국은 회사가 나아갈 지도를 그리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에서 그의 역할은 이처럼 막중하다.


"지도는 그 자체가 대단한 상품은 아니지만 빠른 시간에 행선지를 찾아가게 도와줍니다. 마찬가지로 리서치는 회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을 줍니다. 선진 기업들이 리서치에 신경을 쓰는 것은 미래 경쟁력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리서치는커녕 기초 과학도 홀대한다. 김 박사가 거듭 강조하는 기초 과학은 논리적인 사고와 맞닿아 있지만 단답형에 익숙한 우리는 창의적이지 못하고 논리와 이론이 약하다. 대화로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것도,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것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다. 63년생인 김 박사도 주입식 교육을 피할 수 없었지만 집에서 만큼은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다.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무슨 일이든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가르쳐주셨어요. 하다못해 식탁에 반찬을 놓을 때도 어떻게 해야 밥을 먹기가 편한지 알려주셨습니다."

남다른 가정교육 탓에 김 박사는 또래 아이들보다 생각이 깊었다. 성적이 특별히 우수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이든 한 번 걸러 생각하는 습관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논리적인 힘을 길러주었다. 장래 희망도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81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할 때는 물리학과를 택했다. 때마침 불었던 '아인슈타인 신드롬' 때문이지만 외도는 길지 않았다. 수학과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수학을 만났고, 결국 연세대학원 수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 최고 수학자로 '우뚝'

"남들은 손사래를 치는 수학이지만 저는 왠지 마음이 끌렸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정식은 저 역시 어렵고 재미가 없지만 수학은 골치 아프게 숫자 계산만 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수학'하면 몸서리치는 것은 학교에서 방정식만 외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입식 교육이 문제이지 사실 수학은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대단히 재미있는 과목입니다."

잠깐의 외도 끝에 수학을 다시 만나게 해준 그 여학생과 결혼한 김박사는 좀 더 깊이 있는 학문을 위해 88년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대학시절 전공을 살려 '수리물리'를 공부했지만 1년쯤 지나자 흥미가 사라졌다. 그러던 중 아내 부탁으로 '조합론' 수업을 대신 들으면서 흥분에 휩싸였다.

"조합론은 논리적인 계산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입니다.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저에게 딱 맞았습니다. 그래서 전공을 바꿨지요. 제 운명에서 결정적인 선택은 모두 아내 때문에 이뤄졌으니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93년 뉴저지 주립대학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 박사는 AT&T 벨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램지 넘버' 이론을 세웠다. 램지 넘버란 큰 집단에서는 공통 특성을 갖는 작은 모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물과 얼음의 경계가 섭씨 0도임을 밝혀낸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연구였다.

세계적인 과학지 <사이언스>는 95년 이 이론을 소개하면서 "유한한 개체가 점점 늘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는 길을 열었다"고 치켜세웠다. 그리고 97년, 그는 전산수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풀커슨 상을 받았다.

"3년에 한 번씩 수여하는 플커슨 상은 보통 서너 명이 받는데, 그 해에는 혼자 수상했습니다. 램지 넘버 이론이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97년을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상을 받기 얼마 전 MS로 스카우트되었기 때문입니다.”

AT&T에서 MS로 스카우트

IT 시장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MS는 이론 수학이 경쟁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97년 이론수학 그룹을 만들면서 김 박사를 스카우트했다. 이론수학 그룹이 속한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MSR)는 91년 소프트웨어 기업으로는 MS가 처음 세운 과학연구기관이다.

여기서는 700여 명의 연구원들이 음성인식, 인터페이스, 프로그래밍 툴과 방법론, 운영체제와 네트워크, 그래픽, 자연어 처리, 수리과학 등 40여 개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김 박사는 MSR의 핵심인 이론수학 그룹에서 수학과 이론전산학을 맡았다. 제품 생산에 구애받지 않고 미래 IT 기술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요즘 그가 매달린 것은 랜덤 그래프다.

"인터넷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각 웹 사이트를 꼭지점으로 하는 모형을 만들어 각 사이트에 접속하는 연결선을 그리면 일정한 패턴이 생깁니다. 이 패턴으로 사이트를 어떻게 경영해나갈 것인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지요."

MS의 핵심 인력인 김 박사가 국내에 들어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연구소가 대단히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여느 회사처럼 아침 일찍 출근해 주어진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연구 과제를 찾아 탐구하는 시스템이다. 출퇴근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학회 연구나 학교 강의 등 외부 활동을 하는 데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마냥 나와 있을 수는 없습니다. MS는 혹시나 제가 한국에 정착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눈치입니다. 지난해에는 한 학기를 다 가르쳤지만 올해는 9, 11월만 가르친 것도 그 때문입니다. 10월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느라 불편했지만 연구와 강의를 함께 하느라 피곤하지만 둘 다 매력이 있습니다."

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터라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체질에 맞다. '예를 들어' '가령' 등의 말투가 몸에 배어 있어서 어려운 내용도 쉽게 이해시키고, 격이 없이 토론을 즐기는 성격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단순한 로직이 좋은 프로그램

"전산수학을 가르치는 것은 IT 강국의 체질을 강화시키기 위해섭니다. 국어를 안 배워도 시나 소설을 쓸 수 있지만 전문가와 견주면 수준이 떨어지는 것처럼, 간단한 프로그램은 누구나 만들지만 그 이상은 전문 기술이 필요합니다."

기본기가 있느냐 없느냐가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성능 차이가 얼마 되지 않더라도 아슬아슬한 그 간격 때문에 1등과 2등이 확연히 갈리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프로그램에만 관심이 있지만 논리가 중요합니다. 프로그램을 컴퓨터가 잘 이해하려면 논리가 받쳐줘야 하니까요. 논리가 발달한 사람은 명령어를 한 줄로 만들지만 창의력이 부족하면 몇 페이지로도 모자랍니다. 물론 단순한 프로그램 로직이 이깁니다."

IT 강국인 우리가 모바일과 통신 분야를 빼면 별로 내세울 게 없는 것도, 프로그램이라고 해봐야 백신과 워드프로세서 등에서 겨우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사실은 기초 과학이 약해서다. 세계적인 업체들이 한국 대신 인도에 연구소를 세우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건비가 싸기도 하지만 인도는 수학이론이 발전해서 고급 인력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인건비가 비싼 대신 하드웨어가 받쳐주고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알파니 베타니 해서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는 일반인들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업체 입장에서는 대단히 소중한 인력이지요. 이처럼 인도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에 연구소를 세우지 않는 것은 기초 과학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IT 강국의 힘은 '기초 과학'

그러나 기초 과학과 논리적인 사고는 쉽게 뿌리내리지 않는다. 김 박사는 "학교는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 방식을 바꾸고, 기업은 당장의 상품 개발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연구 개발에 매달리고, 정부는 경쟁력의 뿌리가 되는 기초 과학을 육성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빌게이츠를 두 번 만났는데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도스나 윈도만 잘 만든다고 지금처럼 성공할 수는 없지요. 그런 프로그래밍 기술을 가진 이들이야 우리 나라에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짚어내는 능력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힘은 논리적인 사고에서 비롯되고, 그 배경에는 기초 과학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논리적인 교육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IT 강국으로 거듭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기초 과학은 우리 나라에서도 빌게이츠와 같은 인물을 배출하고 MS와 같은 기업을 키우는 열쇠다.

한국의 미래를 짊어진 학생들에게 이 열쇠를 쥐어주기 위해 그는 오늘도 강단에 서지만 '연구'와 '강의'를 언제까지 계속할지는 모른다. 김 박사는 "둘 다 소중한 일이지만 양손에 쥘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둘 중 더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 중이다. 무엇이든 생각하면서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을 즐기는 그에게 또 다른 즐거움(?)이 생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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