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 정년 퇴임?

65세 미국 국적 정연군 할아버지의 작은 헌혈 소동

등록 2004.12.16 21:24수정 2004.12.1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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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오후 4시 명동거리.


정연군 할아버지는 모처럼 나온 명동 거리의 모습이 낯설었다. 명동 거리는 낭만적이었지만 홀로 걷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했다. 테이크아웃 점에서 커피 한 잔과 비스킷 몇 조각으로 명동의 분위기를 느꼈다.

명동거리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연말 분위기가 묻어난다. 손에는 쇼핑 가방들이 들려 있다. 한 쪽에는 구세군 냄비가 울리고 있고 또 한 쪽에는 헌혈차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할아버지는 헌혈차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똑똑똑…’ 문이 열린다.

헌혈 보조원(이하 보조원) : 무슨 일이세요?
할아버지 : 무슨 일은… 헌혈 좀 하려고요.
보조원 : 예? 연세가 지긋하신데…헌혈하시게요?

보조원들의 시선이 의외라는 듯하다. 보조원들은 서로 바라보며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 지 몰라 한다. 몇몇 젊은 사람들이 헌혈하느라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 : 헌혈하자는데 왜, 되나요?
보조원 : 아니요…그게…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할아버지 : 나? 올 해 65세지.
보조원 : 65세시라고요? 만 65세부터는 헌혈이 안 되시는데요?
할아버지 : 만 65세? 내가 1월 9일생이니까 아직 만으로는 64세일걸세. 그럼 가능하지 않나?
보조원 : 죄송한데 신분증 좀 주시겠어요?
할아버지 : 여기…
보조원 : 어? 국적이 미국이시네요? 한국 분 아니셨어요?
할아버지 : 거 참…헌혈하겠다는데 국적도 따지나? 2년 전엔가도 했었는데.

보조원들은 신분증을 확인하더니 다행히(?) 만 64세라고 했다. 내년 1월 9일부터는 헌혈을 하시고 싶어도 이제 더 이상 하실 수 없다고 한다. 보조원들은 적십자 본사(?)에도 전화를 몇 번 걸었다. 신분증 확인과 예전 헌혈 기록을 확인했다.


보조원 : 2002년에 헌혈을 하셨네요. ‘외국국적동포 국내거소신고증’ 번호도 맞고요. 헌혈 가능하시겠네요.
할아버지 : 뭐가 그리 복잡한가? 헌혈하기 힘드네. 이거야 사정사정해서 헌혈해야 하는 건가요?
보조원 : 죄송해요. 헌혈 조건은 되시니까 우선 간단한 확인 좀 할게요.

보조원은 혈압도 재보고 피를 살짝 뽑아서 간단한 테스트도 해 본다. 헌혈 가능하단다. 할아버지는 적십자 본사의 확인과 신분증을 확인하는 한바탕 소동을 거쳐 드디어 헌혈에 성공했다.

할아버지는 헌혈차 천정을 보며 누워있었다. 그런데 그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헌혈 정년 퇴임식을 오늘 치르는 건가라는 생각과 이제 헌혈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명동 거리의 분주함 속에서 이렇게 마지막 피를 내놓는구나 싶어 만감이 교차했다. 320mg. 할아버지가 사회에 내 놓은 따끈따끈한 혈액이었다.

보조원 : 할아버지는 연세도 상당하신데 혈액이 아주 맑고 건강하네요. 혈액 수치가 13이거든요.
할아버지 : 그래요? 내가 등산을 꾸준히 해서 그런 걸 거요. 그나저나 수치 13은 뭔가?
보조원 : 혈액에도 등급이 있는데 1에서 40으로 나뉘거든요. 숫자가 낮을수록 좋은 혈액이에요. 할아버지는 연세에 비해 혈액이 상당히 건강한 편이에요.
할아버지 : 그런가? 그런 줄 알았으면 진작 헌혈 좀 해 둘걸 그랬네.

대한적십자사 헌혈 '사랑은 동사다' 캠페인. 젊은이들의 헌혈이 필요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한적십자사 헌혈 '사랑은 동사다' 캠페인. 젊은이들의 헌혈이 필요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대한적십자사
12월 15일 오후 4시 사당역 근처 빈대떡집.

필자는 선배님과 함께 어르신 한 분을 뵙기로 했다. 비 내리는 사당역 거리는 평일임에도 사람들로 분주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 4시에 찾아 들어간 빈대떡집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비가 오는 수요일 오후, 사람들은 막걸리를 벗 삼고 있다.

선배님과 나도 막걸리에 빈대떡을 시키고 앉았다. 얼마 후 어르신이 모습을 드러내셨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어르신의 헌혈이야기는 시작됐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내 든 생각은 참으로 부끄럽다는 것이었다. 군대 훈련병 시절 거의 강요에 의한 헌혈 기억밖에 없던 필자에게 어르신의 말씀은 감동 그 자체였다.

01-04-143555. 이야기가 끝난 후 필자가 어르신께 부탁 드려서 확인한 헌혈증서 번호다. 더불어 신분증도 부탁 드렸다. ‘외국국적동포 국내거소신고증’. 처음으로 확인해 본 미국 국적의 신고증이었다. 법적으로 어르신은 한국 분이 아니셨다.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장 명의의 날인이 있는 신고증을 보니 더욱 부끄러웠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청년임을 자부해 온 난 뭐지?

어르신은 헌혈 이야기를 하시는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매우 유쾌한 기억이었다는 것이다. 너무도 친절하게 대해 줬던 헌혈 보조원들을 칭찬하셨고 헌혈차는 명동 2호차였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하셨다. 25일 정도만 늦었어도 헌혈을 못할 뻔 했다는 거다. 만 65세가 되기 전 헌혈을 하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었단다.

어르신은 헌혈 하고 나신 뒤 무얼 받으셨느냐는 제 물음에 껄껄걸 웃으시며 로션을 받으셨단다. 그리고 3일 간은 술, 담배나 무리한 운동은 금하라고 했다는 보조원의 주의사항을 말씀하시면서 기분 좋게 막걸리를 비워 내셨다. ‘괜찮으세요?’라는 물음에도 어르신은 등산으로 단련된 몸이라서 끄떡없다고 하신다.

적십자가 우리나라에서 헌혈을 시작한 것이 27년 되었다, 만 65세가 헌혈 정년이다, 혈액은 1에서 40까지 등급이 나뉜다, 건강한 성인은 400mg을 뽑는데 자신은 320mg을 뽑았다는 등 여러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어르신은 인생의 마지막 헌혈을 그렇게 끝내셨다. 12월 14일 오후 4시 명동 거리에서 헌혈 정년퇴임을 하셨다. 어르신의 헌혈 정년 퇴임사를 대신 해 본다면 이 쯤 되지 않을까?

“헌혈 정년퇴임 65세입니다. 65세까지 건강한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헌혈의 기쁨, 이제 함께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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