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정보 이용, 무엇이 문제인가'

등록 2004.12.24 10:48수정 2004.12.2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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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살인범을 쫓는 박두만 형사는 미국에서 우편물이 하나 도착하기를 학수고대한다. 범인이라고 확신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어느 용의자의 유전자 검사 결과다.

육감에 의존한 수사를 해 온 박 형사에게 미국과학수사기관의 검사 결과는 범인을 옴짝달싹 못하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1980년대 유전자니 DNA니 하는 말들이 생소하던 시절, 이 시골 형사에게 유전자 감식 같은 생체정보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처럼 경이로운 신기술이었다.

생체정보,‘복음’인가 ‘재앙’인가

이제 이 첨단 기술은 경찰 수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손가락만 누르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현관문이나 ‘주인님’의 지문에만 반응하는 노트북 컴퓨터는 이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번거롭게 집 열쇠를 갖고 다닐 필요 없는 출입문 홍채 인식 시스템도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문, DNA, 홍채 등 개인의 신체적·행동적 특성을 통해 신원을 인증하거나 식별하는 생체인식정보.

몸 자체에‘내장’된 것이어서 타인에게 유출되거나 도난 가능성이 없는데다 최고의 정확성까지 갖췄다는 찬사를 받으면서 정맥·음성·필체 인식으로 그 영역을 더욱 확장하고 있는 생체정보는 바야흐로 현대 과학기술에 의한 ‘멋진 신세계’의 개막을 알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생체인식에 대해 우리가 알면 알수록 결코 장밋빛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게 분명해진다. 인권단체와 전문가들은 생체정보의 무분별한 확산을 ‘빅 브라더’ 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전조로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애초에 수집된 목적과는 달리 이용될 소지, 무분별하게 남용될 경우 개인 사생활의 신성한 영역을 마구잡이로 침범하는 흉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 등등.

생체인식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바로 생체인식의 가장 큰 강점, 그 고도의 효율성의 이면에 내포된 것이다. 최대의 강점이 또한 가장 위험한 함정인 셈이다.


유전자를 이용해 미아 찾기에 나선다는 경찰의 계획이 많은 미아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찬반 논란을 일으키며 진통을 겪었던 것은 이 같은 위험성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3일 국가인권위에서 열린 ‘지문 등 생체정보 이용,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토론회는 이 상반된‘두 얼굴’에 대해 탐색하고 고민을 나눠 보는 자리였다.


법학자·변호사·인권시민단체 활동가 등 참석자들은 생체정보의 효율성과 위험성, 바람직한 통제방안 등에 대해 때로는 일치하고 때로는 엇갈리는 의견들을 쏟아냈다. 이날의 활발한 논의는 역으로 생각하면 이 문제가 그만큼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난제임을 보여 준 것이었다.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한 활동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는 이은우 변호사는 발제문에서 생체정보의 특성에 대해 “보편성, 고유성, 영구성 그리고 데이터베이스화하기 쉽다는 점”으로 정리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다 있으면서, 사람마다 다르고, 평생 변하지 않으며, 소량의 정보로도 분석 가공 정도에 따라 대량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생체정보, 데이터베이스화하기 쉽다”

생체정보는 이 같은 편리성으로 그 활용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생체정보 이용에 관한 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선진국’이다. 바로 전 국민의 지문정보가 등록된 주민등록증 및 자동지문인식시스템(AFIS)을 이미 오래 전부터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열 손가락 지문을 날인 받아서 이를 경찰청에 보내고, 경찰청에서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자동지문인식시스템과 연동해 범죄수사에 활용하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그러나 이 같은 일들이 아무런 법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채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럼에도 최근엔 지문으로 작동되는 무인민원발급기도 등장하는 등 자꾸 새로운 용도로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행자부의 지문정보를 민간기업에 개방해 개인 신분 인증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가 반발을 사서 철회한 적도 있다.

공공기관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생체정보를 활용하는 곳이 우후죽순으로 늘고 있다.

“기업에서 사원의 생체정보를 출입시스템 등에 활용하고 있는 사례가 많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고, 파악을 위한 법적 근거도 없는 실정이다.”(이 변호사)

이 변호사는 생체정보의 안전성에 대해 자꾸 새로운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가령 본래의 생체정보에서 일정한 특징만을 뽑아 낸 추출정보로는 원래의 생체정보로 전환할 수 없고, 이를 전용할 가능성도 없다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 연구결과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게 밝혀졌다는 것이다.

생체정보는 연동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의 지문정보와 결합된 거래기록은 행자부의 지문정보, 경찰청의 지문정보와 연동돼 정보가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이 과정에서 본래의 목적에 반한 엉뚱한 용도로 악용된다면 그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또 생체정보 주체의 동의를 얻지 않고 수집·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예컨대 고객이 만진 컵에 남아 있는 지문으로 지문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다. 지금의 홍채 인식 기술로도 이미 1m 정도 떨어진 대상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 몸의 정보가 수집돼 관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 피해의식에 빠지기 쉽다”

참여연대 박원석 시민권리국장은 생체정보 활용을 개인에 대한 권력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는 “생체정보는 이 시스템을 관장하는 기관이 개인들에 대해 우월한 힘을 행사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면서 “사회구성원들의 개인성을 약화시킬 것이고, 특히 유전자 데이터베이스가 애초의 목적 범위에서 벗어나 그 이용이 확대될 경우 장애인이나 특정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 심화 요인이 될 우려도 크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와 지적에 대해 권영빈 중앙대 정보대학원장은 “기술에 대해 과도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하고 반박했다. 신기술에 대한 신중한 접근은 필요하나 그 피해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기술 피해의식’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생체정보는 산업 측면에서 황금알을 낳는 기술이며 이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할 경우 국제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며 반대 의견에 서서 우려를 제기했다.

정연수 한국정보보호진흥원 개인정보보호팀장도 “이미 광범위하게 도입된 생체정보에 대해 그 타당성 자체를 논의하는 것은 너무 늦어 버린 것 아닌가”하는 ‘현실론’을 폈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대)의 문제제기는 좀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한 교수는 주민등록증 날인 반대 싸움을 예로 들면서 “당장 벌어먹기 바쁜데 무슨 인권이냐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우리는 ‘편의의 덫’에 걸려 있는 게 아닌가”하고 반문했다.

“최근 도시 골목 곳곳에 설치되고 있는 방범 CCTV는 일종의 미시권력으로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생체정보의 함정에 주목해야 한다.”

이 같은 시각의 충돌은 ‘바코드’ 논란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권 교수는 “13년 전 바코드 도입 당시 ‘몸속에 바코드를 삽입했다’는 괴담까지 나돌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결국 해프닝 아니었나”라며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자 곧바로 한 교수의 반박이 뒤따랐다. 그는 “만약 10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바코드 정보가 발달한다면, 그건 개인 프라이버시에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면서 “여전히 바코드 문제는 남아 있는 셈”이라고 경계론을 폈다.

생체정보의 악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참석자 모두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같은 공감 속에서도 이를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볼 것이냐는 점에서는 차이가 컸다. 낙관론을 편 권 교수는 프라이비트 뱅킹이나 대학 도서관의 지문인식 출입 정보 시스템이 별문제 없이 운용되는 것을 예로 들면서 “수십조 바이트의 방대한 정보를, 누가 특정한 의도로 뒤지지 않는 한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교수는 “정보의 양이 문제가 아니며 얼마든지 기술발달에 따라 악용할 방법이 개발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개인정보의 관리 책임에 대해서도 “개인의 자기책임과 보안의식의 문제로 봐야 한다”(권 교수), “개인들이 부주의해 정보를 흘리고 다니더라도 그것이 악용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것은 국가의 몫으로 봐야 한다"”(한 교수)는 견해가 팽팽히 맞섰다.

생체정보 관리와 통제 필요성에 공감

이날 토론회의 공방은 굳이 단순화하자면‘인권이냐, 기술이냐’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권 교수는 “새 기술이 나올 때 그 문제점을 먼저 예측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은 매우 어렵다”면서 우리 사회의 성숙도에 비춰볼 때 그 같은 위험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국장은 “기술 도입시 인권 측면에서 부작용에 대한 공론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정보화를 주로 산업정책 측면에서 강조하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확인한 결론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생체정보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매우 필요하다는 데는 일치했다는 점이다. 참석자들이 ‘개인정보영향평가’를 도입하고 정보의 민감도 수준에 대한 규정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중요한 것은 그같은 제도들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폭넓은 참여와 토론, 이를 통한 합리적인 합의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와 이해 관계자만이 아닌 일반시민을 포함해 학습과 논쟁을 유발시키는 ‘참여적 통제’라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박 국장의 주장이나 “다수가 아닌 소수자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이 변호사의 발언이나 모두 같은 맥락이다.

이날 토론은 생체정보에 대한 논의에 있어 시각 차이가 존재하고 그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것을 뚜렷이 드러냈다. 향후에도 그 해법을 찾기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인다. 특히 생체정보 기술이 아직도 개발, 발전중인 초기 단계라는 점에서 장래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또 미국이 입국심사시 생체정보 검사시스템을 도입해 외국인들의 반발을 사고, 유럽연합도 여권에 생체정보를 포함시키기로 하는 등 국제적인 흐름을 고려할 때 어느 한 나라 차원의 논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날 토론회는 그러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 자리였다. 그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가 구체적인 해법을 찾는 다각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이날 토론회에서 확인한 그 공감이 생체정보 문제 해법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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