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든 비학생이든 다 같은 청소년이죠"

[인터뷰] 비학생 청소년 차별에 반대한 박호언군

등록 2004.12.24 18:06수정 2004.12.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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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28일 오후 대전광역시청. 당시 국가인권위는 그곳에서 '지역순회 인권상담 및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부산·광주·전주 등을 돌며 한 달 가까이 진행되던 행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 한 학생이 다가와 "국가인권위는 차별 문제도 다루죠?"하고 물었다.

첫눈에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들어 조사관과 상담하도록 주선하자, 그는 가슴에 묻어 두었던 친구들의 사연을 줄줄이 풀어 놓았다. 바로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 받고 있는 비(非)학생 청소년들의 문제였다.

자신의 문제도 아닌 사안을 들고 국가인권위 임시인권상담센터를 찾아온 주인공은 당시 대전 모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박호언(17)군이다. 박군은 전국적으로 수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종 할인 혜택에서 차별받고 있으니, 정부가 청소년증을 발급함으로써 비학생들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 박호언 군은 비학생 청소년에 대한 차별문제를 비롯해 17건의 진정을 국가인권위에 냈다.

박호언 군은 비학생 청소년에 대한 차별문제를 비롯해 17건의 진정을 국가인권위에 냈다. ⓒ 인권위 김윤섭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외경심을 높이는 감성.'

국가인권위 김창국 위원장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권 감수성'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사실 말이 쉽지 일상 생활에서 그런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청소년'하면 당연히 '학생'을 떠올렸던 필자로서는 한 고등학생의 '인권 감수성'에 뭉클한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박군의 진정이 접수된 직후 국가인권위는 관계기관의 할인 혜택 관련 내용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에게는 10~50%의 할인 혜택을 주면서도 비학생 청소년에게는 할인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관행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국가인권위는 2003년 9월 박군의 진정 내용에 대해 평등권(헌법 제11조) 침해의 차별 행위임을 인정하고, 비학생 청소년에게도 할인제도를 적용할 수 있도록 청소년 관련 법령 및 제도를 개선할 것을 문화관광부장관에게 권고했다.

한편 국가인권위가 조사를 모두 마치고 권고 결정을 내리기 직전, 서울시와 대전광역시는 비학생 청소년들에게도 청소년증을 발급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한 국가인권위의 권고 결정 이후에는 문화관광부 산하 각종 문화시설까지도 비학생을 포함한 모든 청소년에 대한 할인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박군은 자신이 평소 생각해 왔던 또 다른 사안들을 국가인권위에 진정했다. 비록 그가 제출한 17건의 진정 내용이 국가인권위원회법상 조사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모습은 한번쯤 주목해 볼 만한 것이었다.


이중에는 자신이 학교 생활에서 직접 체험한 일도 있었으나, 상당수는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였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박군은 세심한 관심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박군의 어머니에 따르면 박군의 이러한 태도는 천성적이었다고 한다.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TV 뉴스를 보면서 사회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그는,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 문제를 모 기관에 전자민원으로 접수시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인터넷 공간에서 '두발 자율화 서명운동'과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그의 남다른 이력이다.


a 박호언군이 국가인권위에 낸 진정 접수증명원. 이밖에 박호언 군은 '두발자유화' 서명운동 등 적극적으로 청소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박호언군이 국가인권위에 낸 진정 접수증명원. 이밖에 박호언 군은 '두발자유화' 서명운동 등 적극적으로 청소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인권위 김윤섭

박군의 부모님은 이런 아들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고자 하는 길을 막지는 않았다. 2003년 12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엔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퇴를 말렸지만, 결국 "학교에 다니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아들의 생각을 존중했다. 학생에서 비학생이 된 박군은 고졸 검정고시를 치른 뒤 2005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했다. 필자는 문득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휴대전화 커닝 사태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학생들의 태도도 잘못됐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는 듯한 우리 사회의 풍토와 구조가 훨씬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대학에 들어가면 사회 경험을 많이 쌓고 다양한 사람들과 자주 토론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2004년 5월 청소년들의 세계적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우리 사회의 인권문제를 두루 탐색하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프랑스에 가서 갈등과 분쟁에 대해서도 공부할 생각이고요. 우리 나라가 좀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사회의 장점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 한 국가기관에서는 박군을 '2004년 신지식인'으로 선정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검토 중이다. 청소년증 발급을 이끌어내 청소년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는 게 주된 이유다. 이밖에도 박군은 청소년기본법에 따라 문화관광부가 내년부터 운영할 예정인 청소년특별회의의 '인권분과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예전 같으면 문제아 취급을 받았을 것 같은데…. 이젠 국가기관도 달라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박군은 진정한 행복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며, 자신은 앞으로도 국가인권위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들을 계속해서 진정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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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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