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 받는데 2시간 반

[영등포 쪽방촌 성탄 체험기 2]

등록 2004.12.27 16:10수정 2004.12.2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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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 골목.
쪽방촌 골목.뉴스앤조이 신철민
12월 25일 새벽 3시 30분

영등포에서 노숙하는 사람 대부분 두터운 침낭을 가지고 있었다. 침낭이 없으면 이불이라도 있었다. 처음에는 박스로 바람을 가리고 자려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살을 에는 바람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역 광장 길목에 포주 아주머니 몇이 보인다. 아까부터 오가는 사람을 붙잡고 “영계 있어요”를 반복한다. 그 분에게 다가가 “잠만 자는 방 있냐”고 물었다. 2만원을 달라고 한다. 아니 방이 왜 그리 비싸냐고 따졌더니 성탄절이라 빈 방이 별로 없단다. 친절한 아주머니, 찜질방에 가라고 위치를 상세히 알려 주신다.

찜질방을 갈까, 아님 다른 방을 찾을까 고민하다 철공장길로 나갔다. 여기는 낮에는 공장이지만 밤에는 ‘연애’하는 곳으로 바뀐다. 아줌마로 부르기엔 젊고 아가씨로 부르기엔 늙은 여자 한 명이 팔짱을 낀다. 잠만 자는 곳을 찾는다니 만원을 달란다. 침침한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대로변에 있는 건물이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계단을 오르니 토굴 같은 곳이 나온다. 복도 양편으로 방이 즐비하다. 아가씨들이 ‘영업’을 하는 방이다. 나에게 준다던 “깨끗하고 따뜻한 방”은 어디로 갔는지, 미닫이문을 여니 냉기가 엄습한다. 퀴퀴한 냄새는 보너스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등이 붉다는 점. 더 밝은 불이 없냐고 물으니 새 형광등을 가져다 끼운다고 한다. 그냥 두라 말했다. TV는 먹통이다. 이런 상황에선 꼼짝없이 억지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점. 방이 더럽거나 추워서가 아니다. 잠이 들라치면 귀를 때리는 소음 때문이다. 크게 틀어 놓은 성가곡이 괴기스럽다. 라디오인지, TV인지 헨델의 메시아가 좁은 복도를 채웠다.


굵은 매직으로 1호, 2호 적힌 방으로 많은 남자가 오갔다. 군인 무리와 아저씨들은 한동안 방 전체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아침에 찾아온 사람 덕분에 난 겨우 든 잠에서 다시 깨어나야 했다. 하필 옆방에 들 게 뭐람. 문을 열고 아가씨에게 물 한 잔 부탁한다. 잔을 건네며 농을 친다. “오빠 다음에는 잠만 자지 말고 연애도 하자.”

빛이 전혀 들지 않아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다. 핸드폰 시계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방 구석에 로또 잡지가 굴러다닌다. 뒤적뒤적 하다보니 ‘성탄특집’이 눈에 들어온다. 성경이 점지한 행운의 숫자에 관한 이야기다.


어젯밤 소란이 언제였냐는 듯, 복도는 몹시 조용하다. 신을 신고 문을 닫는 소리가 아가씨들의 단잠을 깨우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바깥은 바야흐로 성탄이 한창이다.

백화점 앞에서 노숙을 하다 쫓겨나는 사람.
백화점 앞에서 노숙을 하다 쫓겨나는 사람.뉴스앤조이 신철민

12월 25일 낮 1시

하루만에 영등포역이 친숙해졌다. 의자 주변엔 어제 밤 만났던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요란한 기계를 들고 청소를 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고단해 보인다. 어젯밤 소란의 현장은 다시 바겐세일 하는 백화점 차지다.

이제는 어느 정도 편안해진 의자에 앉아있는데, ‘철도공안’이라는 명찰을 단 사람이 와서 쫓아낸다. 사람들은 혼이 없는 좀비처럼 슬금슬금 사라졌다 이내 모여든다. 보통 사람들을 귀신처럼 가려내던 공안이 나를 보고 “아저씨는 왜 안 가요”라고 쏴붙인다. 나도 잠시 자리를 비켜준다.

토마스의 집 전경.
토마스의 집 전경.뉴스앤조이 신철민
배가 고파진다. 어젯밤 귀동냥을 살려 ‘토마스의 집’으로 간다. 천주교가 운영하는 시설로 낮 12시부터 3시까지 밥을 준다는 것이 내가 들은 정보다. 입구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차도와 붙어 있어 버스에 탄 사람 중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된다. 모자를 눌러 쓴다.

줄을 서 있는 동안 또 여러 소문이 난무한다. 오늘 청량리에서 점퍼를 줬다는 정보도 들린다. 이따 광야교회서 제대로 된 밥을 주니 지금은 조금만 먹으라는 고참의 충고, 서울역은 어떤 날이 맛있고, 청량리역은 언제 가면 좋다는 이야기다.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오늘 유난히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봉사자와 노숙인 사이의 다툼은 여전하다. 봉사자 입장에선 노숙인이 질서를 지키지 않아 불만이고, 노숙인 입장에선 봉사자들이 깔보는 것 같아 화가 난다.

김치 하나와 국이 전부다. 반찬이 일찍 떨어졌기 때문이다. 밥이 너무 많아 보여 덜어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기회를 놓쳤다. 김치를 다 먹은 것을 보고 봉사자가 “김치 더 줄까” 하고 묻는다. 반말에 역정이 났지만 참는다.

평소 밥이나 반찬을 남기지 않는 편이지만 이날은 다 먹기 어려웠다. 워낙 양이 많기도 했지만 국도 반찬도 없는 맨밥을 먹기 어려웠다. 김치를 더 달라고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결국 밥을 남긴 식판을 내미니 “밥 깨끗이 먹어. 그게 뭐야”라는 꾸지람이 돌아온다. 고개를 숙이고 문을 나선다.

12월 25일 오후 3시

성탄예배가 준비된 고가도로 밑. 모두들 조금은 들뜬 표정이다. 오늘 나눠주는 밥이 근사하다는 소식이 있는 데다, 내복까지 준다고 하기 때문이다. 얇은 스티로폼 위에 자리를 잡았다. 행사장 주변으로 평소 아는 얼굴들이 지나간다. 낯익은 목사님, 기자들이 바쁘게 오간다. 다시 모자를 눌러쓴다.

각종 카메라가 사방에서 번득인다. 옆에 앉은 아저씨도 얼굴이 렌즈에 잡힐까봐 걱정이 말이 아니다. 무릎까지 처박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뒤에서 욕설이 터진다. “아따, XX들. 그거 쪼까 주면서 사진은 드럽게 찍네.”

유명인의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이 바로 뒤에 앉았다. 점퍼를 입고 노숙인 사이에 앉은 그는 행사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무대 오른편에는 귀빈석이 보인다. 백도웅, 윤길수, 성해용 목사 등이 앉았다. 뒤에 놓인 난로가 부럽다.

행사가 길어지자 자리에 누운 사람.
행사가 길어지자 자리에 누운 사람.뉴스앤조이 신철민
행사는 지루하게 이어진다. 마음을 울리는 순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명을 하기에는 날씨는 너무 추웠고 아스팔트는 차가웠다. 발은 시리고 손은 굳었다. 견디다 못해 대열을 이탈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니 술판이 한창이다. 나무를 쪼개 땔감을 만들고 있다.

그들 틈에 껴서 불을 쬐고 있는데 CBS 이정식 사장이 에쿠우스 자동차에서 내린다. 마침 그의 차가 들어서는 자리에 오토바이가 서 있었는데, 주인이 어느새 나타나 알아서 자리를 마련한다. 풍채 좋은 그가 귀빈석으로 자리를 잡는다.

구호가 난무한다. 본래 정치에 별 다른 관심이 없는 광야교회 사람들과, 진보 구호를 외치기에 바쁜 주최측이 만나니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행사장 뒤편으로 걸어가니 추레한 비둘기가 구정물을 먹고 있다. 골목 뒤로 늙은 포주가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밥에 쏠려 있는데,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하는 사람들은 계속 이어진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다보니 드디어 밥 시간이 다가왔다. 조그만 광장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됐다.

“왜 옆에서 끼어들고 XX이야.”
“거기 앞에, 사진 찍지 마.”
“어 춥다. 소주나 한잔 하자.”

광야교회 성도들과 자원봉사자가 나서 제지해보지만 고함 소리가 한참 이어진다. 밥을 빨리 먹겠다고 생긴 일이다.

밥을 받아드니 5시 30분. 밥 한 그릇 먹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 무려 2시간 30분이다. 사진기자 요란하던 때 밥을 퍼주던 유명인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밥은 소문처럼 진수성찬은 아니다. 육개장에 밥을 말았다. 김치도 있다. 더운밥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얼었던 몸이 풀린다. 광장에 어스름이 깔린다.

노숙인에게 밥을 퍼주는 유력 인사들.
노숙인에게 밥을 퍼주는 유력 인사들.뉴스앤조이 신철민
이제 좀 숨을 돌리나 했더니 다시 전쟁이다. 내복을 받기 위한 전쟁. 아까보다 더 치열하다. 내복 교환표를 꽉 쥐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이번에는 성적이 우수하다. 비교적 빨리 내복을 받았다.

내복은 다 나눠줬지만, 불만 가득한 사람이 여전하다. 못 받은 사람들은 욕지기를 해댄다. 자원봉사자와 상소리를 해대며 싸우는 아저씨에게 내 내복을 줬다. 다시 광장으로 가는 길, 포주들이 광야교회서 내복을 받는다며 달려간다.

12월 25일 오후 6시 30분

역광장이 들썩거린다. 청년들이 원을 그리고 자기끼리 마주보고 서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만이 아니다. 춤을 추고 손뼉을 친다. 자리에서 방방 뛰며 즐거워한다. "부흥 있으리라 이 땅에"를 반복한다.

원이 워낙 촘촘해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도통 볼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경멸한다. 노래가 바뀌었다.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하며 핍박해도 주님만을 찬양하겠다는 곡이다.

그렇게 한참을 노래하던 그들이 대형을 바꿨다. 댄스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춤을 준비한 몇몇이 앞으로 나섰다. 리더인 것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 더 큰 소리로 외친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산타가 오늘의 주인공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오신 예수님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대합실 화장실로 간다. 그곳은 온풍기가 있어서 좋다. 노숙인들이 내복을 여기서 갈아입었는지 곳곳에 쓰레기가 가득하다. 그 어지러운 곳에 노숙인 한 명이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막대기 대하듯 이리저리 피하며 오줌을 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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