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86회

등록 2004.12.29 07:42수정 2004.12.2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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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방백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운령의 뜸을 들이는 말투에 혹여나 했던 생각이 맞고 있었다. 그는 왜 자신이 본능적으로 그를 죽여야 했다고 느꼈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는 침음성을 터트렸다.

“음....비원(秘苑)이로구나!”


천관의 상대부 역시 실수로 말을 흘렸던 곳. 허둥지둥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이름이다. 운령은 확인해 주듯 고개를 끄떡였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도 이제는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에게도 생각지 못했던 변수요, 예상 못할 사건이라 그녀도 몇 시진을 망설이다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녀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며 말했다.

“그는.....담명(曇明) 장군의 아들이예요.”

“뭐라구....?”


그 말에 방백린과 여섯째 사형이란 인물이 동시에 경악성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놀라지 않을 사람들이다. 특히 셋째사형인 방백린은 더욱 그렇다.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인 경우는 그녀의 기억 속에 없다.

“그...그가... 담명 장군의 아들이라구.....? 정말....정말로...?”

중얼거림이었다. 허탈하면서도 침음성이 섞인 목소리였다. 되도록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고 해도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운령은 말만 들었지 담명 장군을 본 적이 없다. 허나 그녀의 사형 중 몇 사람은 그를 기억하고는 있다. 기억 정도가 아니라 담명이란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도 의식적으로 금하고 있었다는 묵계(黙契)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형이 이렇듯 발작적으로 반응하고 있음은 그녀에게도 크나 큰 짐이 되고 있었다.

이미 셋째 사형 방백린은 정원을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하지만 운령 그녀는 이미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을 하고 온 상태다.

“어떻게 할까요?”

이리저리 거닐던 방백린이 다시 돌아와 술잔을 가득채워 연거두 두잔을 먹은 후 다시 세잔째를 따르려 할 때 그 잔을 잡으며 물은 말이었다. 그의 시선이 운령의 얼굴에 멈췄다.

“너는 이미 결정했구나.”
“사형이 아니라 말씀하시면 언제든 바뀔 수 있어요.”
“초혼령을 가지고 있겠구나.”
“확인되었어요.”
“꼭 죽여야만 하겠지?”

사형은 운령 그녀의 결정이 옳음을 알면서도 묻는다. 죽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안다. 다른 일 같았으면 그녀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다르다.

“더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요.”
“그는 지금..?”
“장안에 있어요. 무적철검 구양휘와 어울리고 있어요.”
“네 말대로 빨리 처리해야 되겠지.”

방백린은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때로 정말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에게는 지금이 그때였다.

“하지만 이 일은 강사제와 상의를 해야 할게다.”
“강사형은 반대할거예요.”
“나에게 했듯이 그를 설득시켜야 되겠지. 그를 제외하고 이번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사형제 간 지켜주어야 할 선이 있다. 이번 일도 그런 경우다. 사제의 고집스런 성격으로 보아 설득은 쉽지 않겠지만 서로 배려를 해주지 않는 사형제 사이라면 큰 일을 같이 하기 어렵다.

“이미 너는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를 해 놓았겠지?”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중얼거림처럼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방백린은 술잔을 마저 채우고는 웃었다. 아픔을 삼키고 있는 웃음이었다. 그러다 그는 술잔을 비우고는 시선을 돌렸다.

“당새아...!”“예....주인님.”
그녀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주위를 감싸 안았다. 그는 웃으며 소리쳤다.

“추어라....오랜 만에 네 춤을 보고 싶구나....”

그 말에 당새아는 운령의 손을 놓고 정원으로 내려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너울너울 춤을 추는 그녀의 춤에는 슬픔이 있었다. 팔을 돌리고 내리는 사위마다 끈끈한 느낌을 주고, 발을 대고 한줌 될 듯한 세류요(細柳腰)를 뒤로 젖혀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가 땅에 닿을 듯 몸을 돌려도 거기에는 눈물이 있었다.

발끝은 풀발을 스치고 이미 이슬이 내린 풀밭은 그녀의 치맛자락을 젖어들게 했지만 그녀는 웃으며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녀의 춤은 슬프다.
그녀의 주인이 지금 슬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화산오검(華山五劍) 중 화심검(和心劍) 화웅(樺雄)은 누가 보더라도 마음이 넉넉할 것으로 보이는 사십대 후반의 인물이었다. 상승검도를 익힌 흔적이나 날카로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매화를 닮은 검술만 아니었다면 그는 그저 검을 장식처럼 가지고 다니는 사람쯤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무시할 만한 무림인은 없었다. 그는 화산오검의 수좌(首座)였고, 마음속에 검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이름없는 객점에서 조용히 보내려 했던 구양휘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자마자 일행들에게 푸짐한 저녁을 사겠다고 해 일행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출발은 화심검 화웅이 종남파(終南派)의 창룡신검(蒼龍神劍) 유은비(劉殷譬)와 함께 구양휘를 찾아옴으로 해서 멈춰야했다.

“구양대협께서 쉬시는데 불쑥 찾아와서 결례나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별 말씀을.... 막 나가려던 참인데 조금만 늦었으면 뵙지 못하셨을 뻔 했소. 헌데 좀처럼 산문을 나서지 않는다는 화선배께서 장안까지 나오신걸 보니 요사이 돌고 있는 소문 때문이시오? 더구나 유선배까지 오신걸 보니 구파일방도 움직이기 시작하신거외까?”

구양휘가 묻는 것은 오룡번의 소문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행들의 가벼운 포권지례에 답례를 보인 화웅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 때문만은 아니오. 우선 구양대협께서 본파에 조속히 소식을 알려주어 감사하오. 사실 본인은 그 사건 때문에 나온 것이오. 여기 유선배 역시 마찬가지고...”

구양휘는 그제서야 이들이 담천의와 함께 본 매봉신검(梅䭰神劍) 탁일항(倬壹恒)과 그의 일행이 죽은 것과 관련하여 강호에 나선 것임을 알았다. 구양휘는 자신이 직접 그 사건을 조사할 수 없자 화산에 급히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강호 동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일을 했을 뿐이오. 헌데 종남파에도 무슨 일이 있었던거요?”

“본 파 역시 같은 시각에 여덟 명의 제자들이 당했소.”

날카로운 눈매와 짧은 턱수염을 기른 창룡신검(蒼龍神劍) 유은비(劉殷譬)는 종남파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다. 종남의 비전검법인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을 극성까지 익혀 종남의 교두(敎頭)라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다면 돌발적인 일이 아니었다는 결론인데..... 종남 제자들도 귀음조(鬼陰爪)에 당한 것이오?”

“아니오. 독(毒)과 지독한 수공(手功)에 당했소. 흔적은 심하지 않지만 뼈나 내부가 완전히 바스라져서 죽었소.”

화산파의 제자들에 이어 종남파까지 당했다면 이건 우연이나 돌발적으로 시비가 붙어 싸운 것이 아니다. 누군가 그들의 행보를 저지할 생각이거나 화산과 종남에 대한 도발이다.

“일단은 이번 양만화에게 자행된 초혼령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화심검 화웅의 생각은 당연했다. 화산과 종남파에서 양만화에게 보낸 제자들이 도중에 당한 것이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소. 본파와 초혼령 간 이간시키려 했거나 아니면 본파에 원한을 가진 자들의 소행일 수도 있소.”

“조사는 진척된 것이오?”

“기이하게도 그들의 흔적이 이곳 장안으로 이어져 있소. 그건 종남의 제자들을 살해한 자들도 마찬가지요.”

그래서 이들이 장안에 들어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조그만 단서라도 얻기 위해 구양휘에게 온 것 같았다.

“후배가 아는 것은 이미 모두 알려 드렸소. 급하게 오는 바람에 사실 더 조사하거나 추적할 수 없었소.”

그 말에 화웅은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그는 일행을 쭉 훑으며 말을 이었다.

“헌데.... 구양대협의 일행 중에 초혼령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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