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에 빠진 거 건져줬더니 인자 굴 주라고라"

전남 함평 갯벌에서 촬영하다 생긴 일

등록 2004.12.29 14:37수정 2004.12.2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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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매섭게 불어오는 겨울날 고향의 바닷가에서 이른 아침을 여는 분들을 촬영하러 나가봤습니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삼각대며 촬영장비 주섬주섬 챙기고 오늘을 위해 준비한 디지털 카메라도 한쪽에 챙겨 갯벌로 나갔습니다.

전라남도 서남해안이 다 그렇듯 제 고향 함평도 읍내에서 10분 남짓 차로 나가면 금세 바닷가가 나옵니다.

그리고 서해안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갯벌입니다.

저같이 사진 찍으러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갯벌은 아름다움의 대상이겠지만, 이곳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갯벌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농부에게 있어서 논밭과 같은 존재입니다.

제가 찾은 이곳 돌머리(이름 참 재미있죠. 정말 이 마을입구에는 한자로 석두마을이라고 적혀있답니다)에는 여름철에는 씨알 굵은 보리새우(오도리라고들 부르죠)와 세발낙지 등이 많이 나고, 지금처럼 겨울철에는 굴이 한창입니다.


얼마전부터 관광객들을 위해서 침목으로 길을 만들었습니다.
얼마전부터 관광객들을 위해서 침목으로 길을 만들었습니다.정상혁
겨울날씨치고는 올 해가 좀 따뜻한 편이어서일까요? 침목에 파래가 많이 끼었습니다.

파래가 많이 끼었습니다. 올 겨울 따뜻해서 일까요?
파래가 많이 끼었습니다. 올 겨울 따뜻해서 일까요?정상혁
다행히 오늘은 물때가 좋은 편이라 아침 일찍 굴 따러 나오신 분들을 촬영할 수 있겠습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굴을 캡니다. 좀처럼 허리를 펴시지 않습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굴을 캡니다. 좀처럼 허리를 펴시지 않습니다.정상혁

이렇게 혼자 앉아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혼자 앉아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정상혁
갯벌이 시작되는 곳에는 벌써 나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맘씨 좋은 서방님네들도 있습니다.

늘 커다란 삼각대에 긴 렌즈를 달고 있는 카메라 탓에 대화가 쉽게 이루어집니다.

"으서 나왔소? 작가시오, 기자요?"
"아녜요. 그냥 취미로 사진 찍으러 나와 봤어요, 저 아주머니들은 엄청 춥겠어요. 그냥 이렇게 서있어도 바람이 매서워서 추운데…."
"아마 돈 버는 재미에 추운 질도 모를 것이요."
"저 아주머니 태우러 오셨어요?"
"잉, 근디 아직 나올라믄 멀었능갑소."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촬영을 위해서 갯벌 근처로 갑니다.

물이 새지 않는 등산화를 신었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들고 있는 카메라와 렌즈까지 하면 제 한두 달치 월급을 모두 쏟아야 살 수 있는 소중한 장비들이라서 더더욱 조심해서 한발씩 내딛었습니다.

일하시는 중간 중간 힐끔거리시며 제가 촬영하는 모습을 보시지만 묵묵하게 굴만 따시는 아주머니들.

아마 저 굴을 팔아 자식들 학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시느라 오늘같이 매서운 영하의 날씨에도 갯벌을 뒤지고 계시겠지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바다와 갯벌, 펼쳐진 산들. 하지만 굴을 따는 저 모습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바다와 갯벌, 펼쳐진 산들. 하지만 굴을 따는 저 모습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정상혁
촬영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벌써 두 롤 가까이 찍어 가는데 문득 TV광고가 생각납니다.

"당신의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당신은 사막 안으로 충분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 한마디에 용기를 내서 아주머니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로 했습니다.

"어이, 총각! 욜로 들어올라고?"
"네. 저 사진 좀 찍으려고요."
"여그 발이 푹푹 빠진 게 들어오지 마씨요."
"아, 괜찮아요."

발이 조금씩 많이 빠지긴 했지만 군데군데 있는 돌들을 밟으면 더 가까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갯벌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건너려 팔짝 뛰어 건너편에 발을 내딛는 순간 사건은 발생했습니다.

부드러운 갯벌에 제 발 두 쪽 모두 약 30센티미터씩 빠져버렸습니다.

바로 요 아래에서 빠졌습니다.
바로 요 아래에서 빠졌습니다.정상혁
신고 벗기 편하기 위해 신발끈을 헐겁게 매두었는데 그게 독이 될 줄이야….

발에 힘을 줘서 빼보니 덜렁 신발은 없이 발만 빠집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발은 점점 갯벌에 깊이 박힙니다.

"저기요. 아주머니. 저 좀 도와주세요."
"거 보씨오. 내가 빠진다고 했소, 안했소?"
"정말 이렇게 빠질 줄은 몰랐어요."
"아따, 나 굴따야된디…."

이렇게 매정하게 말하면서도 이쪽으로 한걸음씩 다가오셔서

"발을 안에서 움직거려보씨오. 그래야 빠지제."
"잘 안되는데요. 제가 그냥 발을 뺄 테니까 신발 좀 꺼내주실래요?"

이곳에 익숙한 아주머니에게도 갯벌에 깊이 박힌 신발을 꺼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봅니다. 주변의 개흙을 모두 걷어내고서야 겨우 신발을 꺼낼 수 있었습니다.

바깥으로 나와서 바닷물에 대충 씻은 후 모습입니다. 그때의 처절함이란...
바깥으로 나와서 바닷물에 대충 씻은 후 모습입니다. 그때의 처절함이란...정상혁
해프닝이 있어서였는지 아주머니가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시더군요.

"어디서 왔소?"
"네. 고향은 함평읍이구요 서울서 사진 찍으러 왔어요."
"여그 멋이 사진찍을 것이 있다고 찍는다우?"
"멋지잖아요. 바다도 멋있고 아주머니들 굴 캐는 모습도 멋지고, 서울서는 이런 거 못 보잖아요."
"근디 총각이요 결혼했소?"
"왜요. 저 사위 삼으시려구요?"
"아따. 결혼했으믄 과부하나 생길 뻔 했응게 그라제."
"아직 결혼 안했으니 다행이네요."

"근데 아주머니, 저 굴 하나만 주시면 안돼요?"
"오매 이 총각, 넉살도 참 좋네이. 뻘에 빠져서 죽는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해서 구해준께 인자 굴 주라고라?"
"…."

그래도 인심은 시골인심입니다.

다리 근처에서 조그마한 돌멩이를 집어 드시더니 능숙한 솜씨로 굴 하나를 까서 주시더군요.

묻은 개흙은 손으로 살짝 걷어내고 입에 넣고 씹으니 첫 맛은 바닷물의 짭짜름한 소금 맛인데 씹어보니 비린내라고는 전혀 없는 고소한 굴맛. 여태껏 어디서 먹었던 굴도 이렇게 맛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추운 날씨로 배터리가 일찍 떨어져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굴도 잘 얻어먹고 사진도 찍고 발 덜 빠지는 길을 물어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슬슬 물이 들어오는 걸 보니 이제 나올 시간인가 봅니다.

한 아주머니의 오늘 수확입니다. 꽤 많지요? 갯바람 맞아가며 캔 굴입니다.
한 아주머니의 오늘 수확입니다. 꽤 많지요? 갯바람 맞아가며 캔 굴입니다.정상혁
무게를 달아보니 3Kg이 조금 안되는군요. 이렇게 잡은 굴은 즉석에서 무게를 달아 사간답니다.

고생하는만큼 금전적인 보상도 뒤따를까요?
고생하는만큼 금전적인 보상도 뒤따를까요?정상혁
어른 말씀 안 들었다가 신발이며 옷이며 온통 다 버렸습니다.

하지만 짧게 나눈 아주머니의 몇 마디와 짭짤한 굴 맛과 함께 오늘 일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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