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할매, 무슨 소원 저리 싹싹 빌고 있을까?

<몸따라 마음따라 115> 금정산 고당봉을 오르며

등록 2004.12.29 15:18수정 2005.01.02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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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고당봉 ⓒ 이종찬

을유년(乙酉年) 닭의 해가 코앞에 다가왔다. 제발 을유년에는 이른 새벽마다 홰를 치며 "꼬끼오"하고 우는 수탉의 소리처럼 그렇게 티없이 맑고 밝은 소리만 들렸으면 좋겠다. "꼬끼오"하는 소리와 함께 이 세상을 칭칭 감아 조이고 있는 모든 어둠이 깡그리 사라지면 정말 좋겠다.

이 세상에서 버림 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활짝 웃는 그런 날들이 365일 동안 계속 이어지면 너무 좋겠다. 이 세상을 끝없이 곪게 하고 이 세상 사람들을 끝없이 갉아 먹는 병균 같은 그런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 먹고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더이상 바람이 없겠다.

어젯밤 막걸리잔을 부딪치는 자리에서 누군가 그랬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열두 띠 중에서 하늘을 나는 새가 들어있는 해는 꼭 하나뿐이라고. 특히 을유(乙酉)는, 새가 하늘(一)과 땅(二)을 이어주는(乙) 해여서 아주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2004년의 해가 서서이 저물어가는 마지막 주말, 묵은 기운을 툭툭 털어내고 새롭고 환한 하늘과 땅의 기운을 가슴 깊숙히 받아들이기 위해 부산 금정산의 으뜸 봉우리 고당봉(姑堂峰, 801.5m)으로 오른다. 고당봉은 바다를 품으며 자라난 부산의 여러 산 중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바위 봉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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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봉으로 올라가는 계곡에서 만난 바위. 마치 공룡발자국 같은 홈이 두어 개 패여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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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가 또렷한 나무를 박아 만든 계단 ⓒ 이종찬

'하늘의 물고기'라고 불리는 범어사(梵魚寺)를 지나 고당봉으로 오르는 산길 옆 계곡 곳곳에는 온몸에 세월의 피멍 같은 돌꽃을 피워낸 바위 덩어리뿐이다. 바위 덩어리의 모습도 제 각각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아도 꼭같이 생긴 바위는 하나도 없다. 사람의 얼굴과 마음이 모두 다르듯이 바위도 제 각각 따로 놀고 있다.

산 허리쯤 오르자 계곡 저만치 평상처럼 널찍한 바위가 눈길을 잡아 끈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위 끄트머리에 마치 공룡 발자국 같은 커다란 홈이 두어개 패여 있다. 누가 새긴 흔적일까. 금샘에서 무지개를 피우며 마구 뛰놀던 물고기가 하늘로 올라가다가 구름에 씻겨 툭 떨군 비늘 자국일까.

아니면 새벽을 기다리던 닭, 새벽이 오면 홰를 치며 "꼬끼오"하고 이 세상을 바라보며 몇 번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봉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던 그 닭이 밤새 꼬꼬거리며 새겨 놓은 발자국일까. 그도 아니면 고모선신(姑母善神)이 된 화주보살이 이 세상 사람들이 아웅다웅 다투는 모습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두어방울 툭 떨군 눈물 자국일까.

나이테가 물결처럼 박힌 동글동글한 나무 계단을 지나 금정산성 북문을 들어서자 저만치 고당봉의 일주문처럼 보이는 약수터가 길을 가로 막는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약수가 금샘에서 흘러나오는 영생불멸의 영약이자 이 세상의 모든 병을 한꺼번에 씻어낸다는 부처님의 감로(甘露)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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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봉 들머리에 있는 약수터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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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봉으로 오르는 길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 이종찬

사자가 입김을 뿜어내는 듯한 약수를 한모금 마시자 오래 묵은 숙취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만 같다. 아니 아니, 2004년 내내 개혁의 발목을 끈질지게 물어 뜯던 그 잘난 국회의원들 때문에 늘 체한 것만 같았던 속이 한꺼번에 후련해지는 것만 같다. 그래, 다가오는 새해에는 정말 속까지 시원한 그런 정치를 했으면 정말 좋겠다.

약수터를 지나 고당봉으로 오르는 산길 곳곳에도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깡마른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다. 이마와 목덜미를 찌르는 듯한 차가운 바늘 바람이 불 때마다 바위가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인지, 새파란 하늘이 나뭇가지를 잡고 흔들고 있는 것인지, 나뭇가지가 바위와 하늘을 흔들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대로 산길이 되어 버린 바위와 숨박꼭질을 하며 조금 더 오르자 저만치 삐쭉뾰쪽 솟아난 고당봉이 보인다. 삐쭉뾰쪽 솟아난 고당봉의 바위 곳곳에도 오랜 시간을 감아올린 돌꽃이 고된 세상의 무늬를 새겨 놓고 있다.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고 고당봉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대로 고당봉의 단청이 되어 버린 듯하다.

숨을 헉헉거리며 고당봉의 코앞에 이르자 넓찍한 바위 위에 이상하게 생긴 붉은 벽돌집 한채가 무르팍을 세운 채 얼굴을 파묻고 있다. '고모영신당'이라는 간판이 붙은 벽돌집 안에는 육십대 남짓한 할머니 한 분이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을 싹싹 비비며 무언가를 애타게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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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봉 코앞에 있는 고모영신당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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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영신당 안에는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무슨 소원을 빌고 있다 ⓒ 이종찬

"저 할매, 무슨 소원을 저리도 싹싹 빌고 있을까?"
"그야 뻔한 기 아이겠습니꺼. 새해에는 아무쪼록 자식들 하는 일 모두 잘 되게 해주고 건강하게 해달라는 그런 소원이겠지예."


그렇게 말하는 나의 부산 길라잡이 노병일 선생이 갑자기 내 눈치를 슬슬 살핀다. 내가 일부러 산등성이에 빗금처럼 쭈욱 그어진 금정산성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 척하자 노병일 선생 역시 고모영신당 앞에 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허리를 넙죽 굽힌다. 그리고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무언가 주문을 외운다.

그래. 이곳이 바로 왜놈들에 의해 불타버린 범어사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한평생 불심으로 살다 죽었다는 화주보살의 넋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때 화주보살이 숨을 거두면서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봉우리 아래에 고모선신(姑母善神)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제(姑母祭)를 지내 주면 금정산의 수호신으로 변해 범어사를 돕겠다'는 말을 남겼다던가.

고당봉 코 앞에 있는 고모영신당은 그 화주보살의 유언에 따라 범어사 스님이 세운 사당이다. 또한 그때부터 1년에 두번씩(음력 1월 15일, 5월 5일) 이 사당에서 고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무녀들이 이 사당에 많이 드나들면서 촛불로 인한 화재 위험 때문에 한때 이 사당을 헐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범어사에 흉한 일이 생겨 다시 세우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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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바위가 뾰쪽삐쭉 솟아난 고당봉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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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봉에 선 나 ⓒ 이종찬

고모영신당을 지나 고당봉으로 오르는 험한 바윗길은 암벽 타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암벽 틈새에도 곰이 웅크리고 겨울잠을 잘 만한 조그만 바위굴이 하나 있다. 그 바위굴 곳곳에도 누군가 켜 놓은 촛불이 희미하게 일렁거리고 있다. 마치 그때 죽은 화주보살의 넋이 아니꼬운 이 세상을 향해 촛불시위를 하고 있는 듯하다.

고당봉에 오르자 갑자기 얼음 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 그래서일까. 고당봉 주변의 바위에서 무언가를 콕콕콕 쪼고 있는 새 한마리가 제대로 날지도 못해 사람이 곁에 다가가도 공처럼 톡톡톡 튀고만 있다. 저 새는 왜 하필 이 높은 봉우리까지 날아왔을까. 저 새도 나처럼 묵은 해를 툭툭 털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위해 이곳까지 날아왔을까.

한문으로 '姑堂峰'(고당봉)이라고 새겨진 벅수 같은 바위 뒤에는 '부산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하긴, 언뜻 바라보면 지리산의 천왕봉 같은 착각이 드는 이 바위에 그런 글씨를 새길 만도 했을 것이다. 왜? 801.5m의 이 바위 봉우리가 항도 부산의 여러 산들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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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봉 바위 주변에는 새 한마리가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톡톡톡 튀고 있었다 ⓒ 이종찬

"아까 고당 할매한테 무슨 소원을 빌었어?"
"을유년 새해에는 저와 형님이 하는 일마다 다 이루어지고 아무쪼록 건강하게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지예."
"고마워. 나도 이 고당봉에서 소원을 한가지 빌어 볼까?"
"……".


다가오는 을유년 새해에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등 따시게 잘 사는 그런 해가 되게 하소서. 다가오는 을유년 새해에는 이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다시 중심에 서서 우리 사회를 살갑게 이끌어가는 그런 해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평등하게 잘 살아가는 그런 한 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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