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간 '닭띠해'엔 무슨 일이 있었나

[역사 돌아보기]1909년부터 1993년까지

등록 2004.12.31 01:28수정 2004.12.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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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 없이 많은 혼란과 갈등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2005년의 새해는 밝아오고 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늘 그렇듯 2005년 '닭의 해(乙酉年)'에도 우리들 삶이 좀더 평화롭고 풍요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기만 하다.

21세기 들어 처음 맞는 닭의 해 첫날에 이러한 우리들의 소망을 기억하면서 지난 20세기 닭의 해에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살펴보자. 우리들이 모두 함께 만들어가야 할 2005년 '닭의 해' 역시 지난 역사의 축적 위에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1909년(己酉)...서구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일본, 조선내 의병 토벌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쓸면서 그 기세가 한창 오르던 이 때 서구인들은 북극점에도 도달했다. 15세기 말 이후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서구인들이 더 빨리 다른 지역에 도달할 수 있는 항로를 찾는 과정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북극지역의 항로는 험한 날씨 때문에 개척에 어려움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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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리

마침내 이 해 4월 6일 미국의 극지 탐험가 피어리가 처음으로 북극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비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 사건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식민지 경쟁 과정에서 나타난 작은 부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서구인들이 식민지 확장에 몰두하며 안정적인 자본주의체제를 성립시켜가는 와중에 그 침탈을 받던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도 가속화했다.

500년 영화를 상실하고 서구 열강에 침탈당하던 오스만 투르크에서는 서구에서 유학한 지식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청년 투르크 당이 4월 23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획득했다.

한편 일본 병합의 최종적인 절차를 남겨놓은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국내 의병을 진압하려고 9월 1일부터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시작했다.

이에 대한 조선민의 저항은 요인암살과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이해 12월에는 비록 실패했으나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하였고 이보다 앞서 10월 26일에는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했다. 이듬해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의 유해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다.

1921년(辛酉)...사회주의 영향 급속도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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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정책을 홍보하는 포스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승국 위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의 후유증으로 여러 해 동안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내전은 진압되었지만 경제는 거의 파탄에 이르러 농민들의 불만은 높아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과 스탈린은 이해 3월 제10회 러시아 공산당 대회를 열고 신경제정책(NEP/New Economic Policy)을 채택했다.

중국에도 사회주의 영향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1920년 8월에 중국공산당소조가 처음으로 생긴 후 이 해 7월 상해에서 천두수가 중심이 돼 중국공산당을 결성했다. 이탈리아의 사회당 좌파도 1월 21일에 공산당을 결성했다.

조선에서도 1918년에 이동휘를 중심으로 결성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이 해 1월 10일 상해에서 대표회를 개최해 당명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다. 12월 3일에는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됐다.

1933년(癸酉) ... 경제공황…자본주의 체제의 서로 다른 대응

1929년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를 일부 수정해 공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미국에서 뉴딜정책으로 나타났다. 이 해 3월에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5월에 이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의 중심이 된 것은 생산과잉의 억제, 구매력 증가를 위한 임금 인상, 노동자 단결권의 보호, 농산물 가격유지, 실업자 구제를 위한 공공사업실시 등이었다. 앞 2가지가 위헌 판결을 받자 정부는 그 내용을 분할 입법하여 실시하였다.

한편 독일의 경우 공황의 여파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경제궁핍과 사회불안의 와중에 선동정치가인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었으며 나치당이 의회를 장악한 것이다.

일본은 공황을 해결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바로 전 해인 1932년에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일본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공급지이자 시장과 군사기지로 삼았고 조선은 일본의 안정적 식량공급지로 만들려는 시도 하에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하여 일본으로 조선 쌀을 공출하였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사법기관의 조정으로 소작쟁의를 방지하는 조선소작조정령(朝鮮小作調停令)을 이해 2월 1일에 시행하였으나 농민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한편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한 것도 이해 11월 4일이다.

1945년(乙酉) ... 해방… 또 다른 위기의 시작

1939년 이래 지속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이해 5월 7일 독일의 항복과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이로 인해 패전국의 식민지로 남아있던 나라들이 일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전승국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포기하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런 와 중에 이 해 9월 2일 호치민[胡志明]을 주석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195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어 북쪽에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남베트남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친미정권이 각각 들어섰다.

이에 반하여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경우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미국, 소련에 의한 분할과 군정이 실시됐고 이후 미-소 냉전구도가 첨예해 지면서 전란과 분단체제 성립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1957년(丁酉) ... 유럽이 뭉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세계질서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극냉전체제로 굳어지는 와중에 기존 세계질서를 주도했던 유럽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이해 3월 27일에 로마에서 조인되었다. 이는 하나의 유럽을 지향하는 흐름 속에서 일어난 현상인데 유럽의 경제발전을 기반으로 미-소의 대립 속에서 위축되어 있던 유럽의 정치적인 지위를 회복하려는 시도다.

초대 가맹국은 프랑스·이탈리아·서독·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였는데 후에 유럽연합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한편 미-소의 냉전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10월 4일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여 우주경쟁에서 미국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우산 아래 놓여 있던 한국에서는 이승만 반공독재체제가 지속되는 한편으로 조봉암, 장건상을 중심으로 한 혁신세력들의 대동통일운동이 추진되면서 혁신 진보세력들의 통합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69년(己酉)... 베트남전에서 발 빼려는 닉슨…장기집권 연장에 들어선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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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베트남 전쟁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이해 7월 25일 해외 순방 도중 괌에 도착해 새로운 대아시아정책을 밝혔다. 이른바 '닉슨 독트린'이다. 주된 내용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우호국이 침략을 받을 경우 방위의 일차적인 책임은 당사국에게 있으며 미국은 옆에서 지지·원조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였으며 나아가 공산국가와 교류·협력하는 단초를 열기도 했다. 이보다 5일 앞서서는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장기집권의 구상 속에 이 해 9월 14일 대통령 3기 연임 허용을 골자로 하는 삼선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을 국회에서 변칙으로 통과시켰다. 이어서 10월 17일 국민투표로 삼선개헌안이 가결되어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게 된다.

1981년(辛酉)... 20세기 흑사병 첫 보고…또 다른 군사정권의 시작

1월 20일 미국에서는 이란의 회교혁명으로 인한 인질사태를 해결하는데 실패한 카터를 대신해 '강한 미국 건설'을 주장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반면 5월 10일 프랑스에서는 사회당 당수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돼 23년 만에 좌파정권이 탄생했다.

6월 미국 공중위생 전문지에 치료수단이 없는 '헤르메스 감염'으로 입원한 남성환자 4명의 증례(證例)가 처음으로 보고되었다. 이듬해 7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명명된 이 질병은 효과적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는 한편으로 감염이 급속하게 번져서 20세기의 흑사병으로 불리기도 했다.

1979년 박정희의 피살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후 고조되던 민주화 요구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정권찬탈과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으로 일시적으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전두환은 80년 9월 1일에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가 이해 2월 25일 12대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었고 3월 3일에 취임하여 제 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한편 이해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총회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1993년(癸酉)...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손잡다…군부정권 끝, 문민정부 출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중동의 가장 큰 문제로 이후 많은 전쟁의 요인이 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냉전구도의 해체와 더불어 평화조성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이런 와중에 노르웨이의 외무장관 홀스트의 중재로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만나 협의안에 합의한 후 이해 9월 13일에 미국 백악관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간에 팔레스타인잠정자치의원칙에관한협정(오슬로 협정)이 조인되었다.

95년 9월 2차 협정으로 완성된 오슬로 협정의 기본 원칙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케 하는 대신 아랍세계는 이스라엘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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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의 철군을 진행시켰고 팔레스타인은 96년 2월 잠정 자치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측 서명 당사자인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1995년 11월 암살당하고 뒤이어 집권한 우파연합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 당국에 점령지를 반환하기를 거부하면서 협정 이행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2월 25일 한국에서는 1961년 이후 처음으로 문민정부가 탄생함으로써 군부정치가 막을 내렸다.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이던 이해 3월 19일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송하고 8월 12일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남북관계와 경제개혁에 진보적인 모습을 일부 보였으나 군사정권 담당자들과 연합으로 탄생한 정부라는 태생적인 한계와 보수세력들의 견제를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서 급격히 보수화되었다. 또 정권 말기에는 경제정책의 실패로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등 실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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