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세밑 '예수'의 죽음

[손석춘 칼럼] 국회의 밤을 밝히는 촛불 속 노동자

등록 2004.12.29 19:39수정 2004.12.29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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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 밤. 문밖을 본다. 빨간 십자가들이 곰비임비 반짝인다. 기독교가 급성장한 공화국. 대한민국이다. 세밑이면 더하다. 십자가 아래마다 기쁨과 축복이 넘친다.

예수. 기독교인의 구세주. 그는 조롱과 학대 속에 살해되었다. 평생을 노동자로 일했다. 목수였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전태일의 분신에서 예수의 재현을 읽었다. 문제는 고난이, 예수의 고통이, 오늘 이 땅에서 끊임없이 벌어진다는 데 있다.

국회의 어둠을 밝히는 저 수많은 촛불들을 보라. 국가보안법으로 꽁꽁 묶어온 민중의 영혼이 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그 촛불 아래서 한 노동자를 애도하는 까닭이다.

김춘봉. 마흔 아홉 살. 남해에 태를 묻었다. 스무 해 넘도록 한 일터에서 삶을 바쳤다. 한진중공업. 가난한 노동자로선 어림잡기 힘든 천문학적 순익을 기록했다. 그런데도 '희망퇴직'을 강요했다. 그리고 2004년 12월. 20대, 30대, 40대를 온전히 바친 일터에서 목을 맸다.

어느새 잊혀져 가는 '피묻은 유서'

그렇다. 눈물과 분노를 삼키며 쓴다. 그 곳 난간에 목을 맬 때까지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천명'을 앞둔 노동자는. 얼마나 대한민국이 서러웠을까.

"부탁도 하고 애원도 해보았지만 모두 허사다. 계약만료일이 되면 쫒아내겠지. 다시는 이런 비정규직이 없어야한다. 나 한사람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잘되면…. 비정규직이란 직업이 정말로 무섭다."

하지만 '피묻은 유서'는 어느새 잊혀간다. 신문과 방송의 외면과 축소 탓이다. 그래서다. 비정규직노동자의 차별철폐를 절규하며 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따르는 데도 노동부는 거꾸로 가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국회에 제출한 비정규직 '보호'법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언죽번죽 강변할 터인가.


겨우 1년 전이다. 한진중공업에선 노조지회장이 '129일 고공농성' 끝에 목매 자살했다. 김주익 지회장의 유서에는 언론에 대한 고발이 있다.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1년 당기 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상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상금까지 챙겨가고…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들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팔십 몇 만원. 근속 년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 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 아픔을 딛고 한진중 정규직 노조는 '촉탁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했다. 민주노총도 보름 전 기자회견을 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법제도적 보호장치 없이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삶의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대책을 세울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그러나 재벌도 정부도 언론도 모르쇠 했다.

고 김춘봉의 유서를 보라. "절대 못나간다.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고 수차 이야기를 하여도 도와주지도 보지도 않았다. 힘없고 돈없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되어도 되는지."

부자신문·재벌·노동부가 '살해 공범'

2004년이 열릴 때 '비정규직 차별철폐' 유서를 남기고 몸을 불태운 박일수. 그리고 세밑에 목을 맨 김춘봉. 지금 이 순간도 '경찰청 비정규직'을 비롯해 숱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말했듯이 "세계를 위해 고난 당하는 민중"이 바로 예수다. 오늘 우리 사회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 안은 비정규직 노동자, 저 수많은 김춘봉이 바로 예수가 아닐까.

하여, 묻는다. '예수'를 살해한자, 오늘 누구인가. 비정규직 문제를 살천스레 정규직 탓으로 돌리는 저 부자신문과 천박한 재벌, 그리고 '참여정부'의 노동부가 '공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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