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과 도서관

[주장] 국가보안법은 도서관의 지적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등록 2004.12.30 12:55수정 2004.12.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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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지적 자유는 도서관 내외의 간섭과 규제를 반대하고 시민의 자유로운 정보이용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공공도서관 활동의 철학적 기본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지적자유에 대한 사례연구(정현태)' 중에서


최근의 도서관 모습을 보면 불과 몇 년 사이에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비스 내용면에서는 책을 볼 수 있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역할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다양한 주제의 강좌, 강연을 열기도 합니다.

조금 큰 도서관에서는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추고 있습니다. 또 도서관 본의는 아니지만 게임방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여유가 되는 도서관에서는 만화책도 상당수 갖추어 놓고 있습니다. 이처럼 도서관은 교육, 문화, 오락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멀티 플레이어이자 종합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카페를 방불케 하는 예쁜 건물과 인테리어, 점점 다양해지고 예뻐지는 도서관 가구들. 과거의 딱딱한 도서관 이미지와는 많은 다르다는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린이 도서관이 많이 생겨 도서관이 놀이방의 기능도 하게 되었습니다. 도서관내 '정숙'이라는 고정관념도 서서히 깨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서관은 점점 다양해지고,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도서관의 지적 자유의 제한입니다.

도서관은 이용자에게 전 주제 분야에 걸쳐 포괄적인 자료제공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안보', '사회질서', '미풍양속' 유지라는 이유로 책 선정과 이용에 제약을 받아 왔습니다. 즉, 도서관이 이용자들의 자유로운 자료접근 권리를 막아온 것입니다.

사회가 자유화(민주화)됨에 따라 많은 부분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국가안보'나 '이념'과 관련한 책을 갖추어 놓는 것에는 여전히 유무형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압박의 바탕에는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현장 사서들은 책이름에 '맑스', '북한', '좌파',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구입을 꺼립니다. 사서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자기검열을 스스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사서들이 막상 '이념서적'들을 구입하려고 하더라도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는 상사나 결재권자들의 제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이른바 '진보'를 지향한다는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도서관에서는 신문 구독을 해야 한다는 사서들과 구독을 반대하는 관장 혹은 상사들 사이에 마찰이 심심치 않게 있었습니다. '이념'에 대한 경직성이나 '레드 콤플렉스' 정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상징되는 냉전적 사회 분위기로 '이념' 서적들을 '국가안보 유지'라는 이유로 금기시 해왔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현재까지 사서들에게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도서관에서 겪는 압박뿐 아니라 국가기관에서 구체적인 압박과 규제를 받기도 합니다.

다음은 학교도서관에서 있었던 국가보안법 위반 사례입니다.

1990년 충청북도 S중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L씨는, 이적표현물로 판시된 <한국민중사1>, <아리랑2>,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러시아혁명사>, <미완의 귀향일기>, <제주민중항쟁1, 2>의 책자를 학교도서실에 보관하며 탐독하였기에 이적행위 목적이 있다고 혐의가 인정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을 판결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와 같은 하급법원의 판결에 대해 무리한 법 적용을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지방법원에 환송하였다.

대법원은 교사인 피고인이 학교도서실에 보관중인 책들에 대해 이적성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를 탐독한 사실만으로 적에게 이롭게 할 목적이 있는 이적행위로 간주할 수 없다는 취지하에 하급법원의 국가보안법 적용을 파기하였다.

- 대법원1992.4.14 선고90도3001판결


물론 이 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고는 하나 판결 내용이 이적행위에 대한 판단만 있을 뿐 헌법 제22조 1항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기본권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죄가 유무죄를 떠나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압박인 것입니다.

'옛날이나 그랬지 지금 어디 그러냐?'고 할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이러한 국가기관의 규제는 2004년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2004년 5월 24일 교육인적자원부가 '대학도서관내 이적 도서 관리에 대한 조치' 라는 제목으로 각 대학에 보낸 공문
2004년 5월 24일 교육인적자원부가 '대학도서관내 이적 도서 관리에 대한 조치' 라는 제목으로 각 대학에 보낸 공문문동섭
지난 5월 말, 교육인적자원부는 <김정일의 통일전략>이라는 책을 갖고 있는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파기, 소각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이유는 이 책이 대한민국을 괴뢰정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러한 지침이 이른바 '특수자료 취급지침'에 의한 것이라고 하나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 고무) 5항(제1항·제3항 또는 제4항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도서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는 그 각항에 정한 형에 처한다(개정91.5.31))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도서관 역시 국가보안법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서와 도서관이 책 선정과 수집에서 이와 같은 유무형의 압박을 계속해서 받는다는 것은 이용자들의 지적 자유를 제한하는 권리침해의 문제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지적 자유의 제한은 국민들이 한정된 탐구와 사유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이는 모든 발전의 근간이 되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억누른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도서관이 소장해야 할 책의 선정과 수집의 기준은 이용자들의 요구, 사서의 양심과 사명감, 도서관의 존재 의미에 따라야지 법이나 국가기관의 지침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은 그동안 인권유린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에서도 철폐해야 할 악법이지만 도서관 이용자, 아니 국민들의 지적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에서도 반드시 없어져야 할 구시대의 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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