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15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여지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4.12.31 08:17수정 2004.12.3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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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을 나선 김병학은 집으로 향하며 파초선이 늘어진 평교자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찌한다? 길을 접는다?’

김병학은 이제 대원군을 극복할 길이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안동 김씨 세도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숙부 김좌근이 실각한 이후 가문의 모든 짐이 일시에 자기 어깨위로 내려앉는 듯한 부담을 느꼈다. 대원군에 붙어 세를 유지하긴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존의 방편일 뿐 궁극에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이 세도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아직 조정의 실세로 군림하는 친동생 병국이나 사촌형님 병익 등이 존재하는 것이 위안이 되기는 하였으나 이들 역시도 자신처럼 대원군의 배려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터였다.

“어쩌면 넘을 수 없는 산일지도 몰라.”

“예? 뭐라 하셨습니까. 대감마님?”

김병학이 수염을 쓸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자 가마 옆에서 걷던 집사 안기주가 물었다. 안롱(按籠)을 들고 ‘쉬 물렀거라’며 벽제를 하는 앞쪽의 소란 속에서도 용케 김병학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아, 아니야. 그냥 혼잣말을 해 봤어.”

“혹시 운현궁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이 달 안에 내게 영의정 제수를 하겠다는군.”

“그 말씀이야 어차피 나돌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올 것이 왔을 뿐이지요.”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단 말씀이야. 대원위 대감도 내 속뜻을 아주 모르진 않을 터인데 순순히 날 받아들이고 있단 말이지.”

“대원위 대감이 자신이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자신이라......”

그럴 만도 했다.
아편전쟁(1840~42) 이후, 태평천국의 난(1851~1864)으로 괴로움에 시달리던 청이 애로호 사건을 기화로 벌어진 제 2차 아편전쟁(1856~1860) 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에 의해 북경을 함락 당하고 황제가 열하로 몽진한 사건은 중국 뿐 아니라 조선에도 일대 파문을 불러왔었다. 그 첫 번째 파란은 전쟁의 중재 대가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영유하면서 조선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때가 기회였는데......’

김병학이 혼자 쓴 입맛을 다셨다.

신왕 즉위 원년(1864) 2월에 5명의 아라사인이 두만강 건너 경흥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자 당시의 전권 담당자인 대원군이 긴장하게 되었다. 조정은 북변의 급박한 소식을 듣고 통상교섭에 일체 응하지 말 것을 엄중 시달하는 한편, 아라사인과 접선한 조선인을 처형하도록 명하는 등 강경대응으로 임했다.

단지 몇 명의 아라사인이 벌인 월경 통상 요구였으나 대원군 입장에선 사건 배후에 있는 아라사 제국의 위험성을 걱정하였기에 최고 집정자로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보다 높은 차원의 정치적 대책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 9월에도 수십 명의 아라사인이 집단으로 두만강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고 11월에도 두 차례나 경흥에 나타나 국서를 전달하며 강력하게 통교를 강요한 후 군함을 원산항에 출동시켜 압박을 가해오자 대원군은 법국이나 영길리의 힘으로 아라사의 남하를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구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에는 천주교인 홍봉주와 남종삼 등의 제안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조선에 들어와 활동 중이던 프랑스 신부 베르뇌(Berneux) 주교와 선을 대어 프랑스의 힘을 빌리려 하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면담은 좀처럼 성사되지 않고 시일만 지연시키게 되었다.

김병학은 이 때를 노렸다. 선왕대부터 사도(邪敎)로 금해 온 천주교에 사적으로 접근해 국론을 논하려는 대원군에게 정치적 총공세를 퍼부었다.

천주교는 조선의 전통적 가치체계인 반-상의 신분사회와 부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지도(悖倫之道)로 간주되어 박해받던 존재였기 때문에 당대의 정권 담당자가 박해 대상인 천주교도와 접촉한다는 것은 정치적 반발세력의 공격을 이끌어 낼 최고의 기회였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 불찰이야. 발톱을 빼려 했던 것인데 날개까지 달아준 꼴이 되어 버렸어.”

“그 때 일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 일이라면 대감마님께선 최선책을 쓰신 겁니다. 다만 대원위 대감이 보통이 넘는 인물이었을 뿐이지요. 어찌 그런 수를 두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정말 그랬다. 누가 봐도 대원군의 퇴진은 예정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안동 김문을 비롯해 축출된 구 집권정객과 대원군 정권체제 내의 정객이면서도 대원군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현직 고관들, 집권 과정에서 정치적 실권을 상실한 조 대비와 풍양 조씨 가문의 정객, 서원 혁파에 반감을 가진 지방의 유림 세력이 총 결집한 일전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너무도 발 빠르게 기존의 자세를 바꾸어 역전의 기회로 만들어 버렸다. 종래의 천주교 접근 자세를 뒤집고 천주교 박해를 신속하게 단행했다. 단행한 정도가 아니라 정조, 순조 연간의 박해들은 차라리 자비로웠다 싶을 만큼 지독한 피바람을 일으키며 강하게 탄압했다.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20여 년간이나 활동해 오던 부교구장 다블뢰(Daveluy)주교, 그 밖에 7명의 법국 성직자를 체포 처형하고 중진 교인들을 대거 처형함으로써 조선 교회의 사목조직(司牧組織)을 와해 시켰다.

단호한 박해의 강행으로 대원군은 자기의 척사위정 정치 노선을 백성들에게 명백하게 효시하고, 전통적 성리학 가치체계의 수호를 백성 앞에 명시하여 보국안민의 치자(治者)임을 과시함으로써 의혹과 반감을 품고 달려들던 정치적 공세를 일거에 잠재울 수 있었다.

더구나 고종의 국혼 문제를 가지고 조 대비가 스스로 수렴청정을 거두도록 만들고 천주교 박해의 여세를 몰아 대립 정객을 몰아낼 수 있었으니 대원군에게 전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독단할 수 있는 기회만 제공한 꼴이 되었다.

“작년에 처형된 교인만도 2000은 족히 되지요?”

“장계에 오른 숫자가 그러하니 실상은 그보다 더 된다고 봐야겠지.”

김병학은 그리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안기주가 맘에 걸렸던 것이다.

자신과 안기주의 인연은 어쩌면 천주교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13년 전 현감으로 관직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 천주교인으로 발고되어 온 자가 스무 살 무렵의 젊은 안기주였다. 그 아비가 고을에서 아전을 하는 중인 집안의 자제로 아전직을 세습하지 않고 밖으로만 나돈다던 위인이었는데 급기야 이웃의 발고가 있었기에 잡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기주 본인은 신자임을 부정하고 배교의 말을 서슴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저주를 하라면 하고,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라면 지나갔다. 당연히 그를 발고했던 이웃이 무고죄로 곤장을 맞는 것으로 사안은 끝이 났지만 김병학은 안기주를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신자는 맞는데 저토록 배교의 말을 서슴지 않는다. 병오년의 서슬퍼런 박해도 이미 10여년이 지난 뒤여서 신자임을 밝혀졌다 하더라도 가볍게 징계나 당하고 말 처지였을 텐데 그렇게까지 부정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저 치는 어떤 그릇일까.

이런 것들이 김병학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술친구도 하고 세상이야기도 듣고 하며 사람을 탐색하였던 것인데 안기주의 활달한 도량과 가볍지 않은 사람됨이 오늘 날까지 자신의 집에 거두어 가까이 하게 된 사연이었다.

이번 병인박해를 주도한 것도 김병학 자신이었다. 그러나 가깝기로도 형제 다음이라면 서럽고, 집안 대소사며 자신의 의중까지도 훤히 꿰고 있을 안기주가 천주교 박해에 대해선 언급 한 번 하지 않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모르는 것이 천주교에 대한 안기주의 마음이었다.

“이쯤에서 진정될 만도 한데요.”

“그리 쉽진 않을 게야......”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2000명 이상의 희생이 있고 나서 정권이 안정되자 병인년 초여름 쯤 박해가 소강상태에 드는 듯 하였다. 대원군으로서도 얻을 것들을 다 얻었으니 이쯤에서 만족할 만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병인년 8월 이후 10월까지 벌어진 양요를 겪으며 사태가 급전직하(急轉直下)하여 박해가 맹렬하게 재개되었다. 이 사건 이후 천주교도들은 ‘초구지도(招寇之徒)’‘통외분자(通外分子)’인 역도로 낙인 찍혀 마구 학살되는 참극이 전국 각지, 특히 경향과 내포지방에서 격렬하게 다시 벌어졌다.

심지어 대원군은 선참후계(先斬後啓)령을 발동하여 적발 포착된 교인을 일단 처형하고 나중에 조정에 계를 올려 보고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처형되어 기록된 자가 4000을 넘게 헤아리니 숨어 있다가 병들어 죽은 자나 굶은 죽은 자, 사사로이 죽임을 당한 자 등을 합한다면 그 수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나서 지금 잠시 주춤하기는 하지만 워낙 나라 외적인 변수가 많은 때라 누구도 박해의 소강에 대해서 확언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말 없이 걷기만 했다. 한 사람은 가마에 실려, 또 한 사람은 자신의 두 발에 의지해 묵묵히 앞만 보고 가는데 안기주의 눈에 저만치 모퉁이에서 나오고 있는 말 탄 장수 한 사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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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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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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