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국민들은 발뻗고 자고 싶다

도둑맞은 ‘31일’ 발 뻗고 자는 자 누구인가?

등록 2004.12.31 14:12수정 2004.12.3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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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라는 위인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의자와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지키기 위함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을 비롯한 수십 명은 그렇게 31일 새벽을 지켰다.

따뜻한 실내에서 양복 윗도리까지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 차림에 잠을 잔다고? 쓴웃음이 나온다. 2004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언론들이 전한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이다. 보도에는 국회의원들이 힘들게(?) 국회의사당을 지키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따라 붙었다.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의 의원들’, ‘노숙자가 아닙니다’ 등의 설명이 붙은 사진들을 보면 이들이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바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국회의원들이 이렇게 애쓰던(?) 같은 시각 국민들은 국회앞 광장에서 26일째 국보법 끝장단식을 지속했다. 영하 4-5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속에서 촛불문화제를 지켰다. 국회의원들이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일 때 이들은 물과 소금마저 끊은 채 ‘강인하고 치열한 모습’으로 국보법 폐지를 위한 촛불을 들었다.

국보법 폐지하려는 자 추위와 단식으로 고통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국보법 지키려는 자 따뜻한 곳에서 발 뻗고 코고느라 피곤하다. 국보법 폐지하려는 자 꿋꿋하게 26일간을 버티는데, 국보법 지키려는 자 하루가 힘들다며 잠을 못 이긴다.

국민들에게서 인권을 빼앗고 평화를 앗아간 이, 한 해의 마지막을 희망으로 갈무리 할 기회인 ‘31일’의 여유마저 도둑질 해 간 이, 국회의원들이여 당신들이 어찌하여 두 발 뻗고 잠을 자는가?

국보법을 지키려는 모습에는 진정성도 진실성도 간절함도 배어나지 않는다. 하룻밤이 버거워 곯아 떨어지는 모습이나 국가정체성을 위한다는 명분도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분도 와 닿지 않는다. 간절함도 명분도 없는 것을 지키려니 힘만 드는 것이다. 그러니 졸릴 수밖에. 국보법을 지키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국보법을 폐지하려는 모습에는 진정함과 목숨을 건 간절함이 있다. 추위와 배고픔을 감수하더라도 내일의 희망을 위해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과 인권 회복,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애절한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을 위해 26일이 지나도록 싸우고 있다. 국보법을 폐지하려는 국민들의 모습은 그래서 숙연하기까지 하다.

1년의 마지막 날 국보법을 둘러 싼 국회의원들과 국민들의 상반된 모습이다. 옛 속담에 ‘도둑질한 사람은 오그리고 자고 도둑맞은 사람은 펴고 잔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다. 적어도 국보법의 현실은 아니다.

국보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사람들은 국회의원이 되어 두 발 뻗고 잘 자지만, 국보법으로 인권을 도둑맞고 고문의 상처를 안은 사람들은 밤마다 악몽을 꾸며 잠자리를 설친다. 국보법을 지키려는 국회의원은 ‘당당하게’ 간첩몰이를 해 대지만, 국보법을 폐지하려는 국회의원은 숱한 간첩모략에 시달리고 있다.

도둑질 한 사람과 도둑맞은 사람의 처지가 뒤바뀐 상황이다. 국보법은 그런 것이다. 국보법을 들이대는 순간 모든 것은 이상하게 바뀐다. 논리를 상실한다.

이젠 정상으로 돌리자. 그 기본 전제는 국보법 폐지다. 2005년에는 논리를 되살리고 명분과 원칙이 있는 정치를 하자. 새해 1월 1일은 희망으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싶다. 새로운 정치를 보고 싶다. 국보법 없는 ‘1월 1일’ 정말이지 국민들은 발뻗고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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