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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숙
새 달력이 하나 둘 들어오는 요즘이다. 우리 집, 한 장 남은 12월 달력에는 빨간 동그라미 서너 개가 그려져 있다. 지난해 이맘때 새 달력을 넘겨가며 아들 녀석이 일일이 표시해 놓은 것이다.
그 중 두 겹으로 그려놓은 동그라미 옆에는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이라고 써 있다. 지난 토요일은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16주년 되는 날이었다.
생각해보니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서 그날을 특별히 보낸 기억은 없다. 남들은 기념일에 신혼 여행지였던 곳을 다시 가본다거나 근사한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런 건 고사하고 둘이 나가 영화 한 번 본 적도 없다. 남편이 그쪽 방면으로 워낙 주변머리 없는 것을 아는 터에 나 혼자 신혼의 추억을 주절주절 꺼내놨다가 다음날이면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다만 뭐라고 써 있는 쪽지를 몇 번 받아본 적은 있다. 면전에서 말하기에는 쑥스러워 표현하지 못했던 얘기를 꽤 정성들여 쓴 것인데, 결국 같이 사는 동안 사랑하며 건강하게 잘 살자 하는 내용이다.
어쩌면 그 글을 썼던 시간만큼은 마누라인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않았을까 싶어, 그 순간 남편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괜히 웃음이 나온다.
남편의 글을 기념일 즈음해서 한 번씩 꺼내본다. 어떤 대목에서는 이렇게 간지러운 표현을 어떻게 썼을까 싶으면서도 그 감미로운 분위기에 젖어 내가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결혼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기념일이 한두 해 늘어나면서 그만큼 고운정 미운정이 쌓인다. 햇수의 많고 적음이 현실과 꿈을 가르진 않을 테지만, 같이 살아온 열여섯 해의 시간들이 꿈결 같다. 그 꿈결에 잠겼던 기념일 저녁, 남편이 내게 책 두 권을 건넸다.
"제목만 보고 샀어!"
시집이었다. 황지우의 <나는 너다>와 김초혜의 <사랑굿>이었다. 제목만 보고 샀다는 말을 강조하는 건, 나는 너? 당신이 나란 얘긴가? 음, 그리고 사랑굿이라…. 두 제목을 읊어보니 꽤 의미 있게 다가온다.
언제 준비했는지 남편은 유리컵 두 개를 상에 올려놓고 맥주를 꺼냈다. 그리고 빨간 초에 불을 밝혔다. 아들 녀석이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하며 형광등을 껐다. 어둠마저 포근한 밤, 촛불 빛으로 보는 남편과 아이들의 얼굴이 붉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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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숙
"어떻게 이런 근사한 생각을 다 했어?"
우리는 가득 채운 맥주잔을 경쾌하게 부딪혔다. 그러자 멋쩍게 웃는 남편이 불꽃놀이용 막대 두 개에 불을 붙였다. "치지지직" 하고 불이 붙자마자 불꽃은 금색 별모양을 하며 사라졌다.
"어, 이거 위험하지 않아?"
내가 놀라 물었다.
"미리 시험해보고 왔어. 문구점 아줌마가 괜찮댔어!"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아이들 둘이 불꽃막대를 하나씩 들고 축하노래를 불렀다. 우리들 앞에 하트모양의 불꽃이 그려지다가 사라지곤 했다. 나는 너! 그리고 사랑굿으로 함께 할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을 확인했던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이렇게 화려하고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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