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3일 재선이 확정된 부시 대통령이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연합뉴스=AP
2기 부시 행정부의 출범을 10여일 앞두고, AP통신은 2기 부시 행정부에서도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이라고 지목한 이라크, 이란, 북한 문제가 최대 외교 현안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러한 전망을 뒷받침하듯 이들 세 나라를 중심으로 한 세계 정세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불확실성'에 휩싸이고 있다.
2기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막가파식 일방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은 이들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 여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의 축" 발언 자체가 일방주의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 전반에 미치는 파장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세 나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유럽연합(EU), 중국, 러시아 등 다른 강대국들과 한국, 일본 등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좌우할 핵심적인 변수가 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이 자의적인 잣대로 지목한 "악의 축" 국가들에 대한 일방주의를 철회하지 않으면, 주요 강대국들과 미국의 관계도 악화될 공산도 크다.
그러나 이들 세 나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철수 시한을 못박으라는 국내외의 요구를 묵살하면서 점령 정책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또한 EU와 이란 사이의 핵 협상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고, 북한에 대해서도 강경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일단 관심의 초점은 이라크이다. 미국이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운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가 아니라 부시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이를 만회하고자 부시 행정부는 1월 30일로 예정된 이라크 선거를 예정대로 치르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이라크의 유혈사태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고, 수니파의 다수와 시아파의 일부는 선거를 보이콧한 상태이다.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것처럼 1월 30일 선거가 무사히 치러지고 이라크가 안정화된다면, 미국은 이란, 북한에 보다 많이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시의 '희망 사항'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미국, 이란의 WTO 가입 저지
이란의 핵 개발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이란, 미국과 EU·중국·러시아의 갈등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라크 침공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독일, 프랑스, 중국, 러시아는 이란마저 미국의 손에 넘겨줄 수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이란을 설득해 우라늄 농축 활동을 중단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유럽연합은 핵무기 개발 전용이 어려운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고, 경수로 가동에 사용되는 핵연료의 제공을 보장하며, 무역협정 체결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지원 등 경제적 혜택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타협안에 대해 부시 행정부가 못마땅해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근 이란의 WTO 가입을 미국이 저지한 것이다. 미국은 이란이 핵 개발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 혜택을 줄 수 없다며 EU가 약속한 이란의 WTO 가입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이란 정부는 미국은 물론이고 EU까지 비난하고 있다. 작년 11월 EU와 이란 사이에 타결된 핵 합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란은 1월 17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개혁 성향의 모하메드 카타미 대통령의 중임이 끝남에 따라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선거에서 보수파가 승리할 경우 이란 핵 문제는 또 하나의 변수를 만날 수도 있다.
이처럼 미국이 EU-이란 핵 합의에 딴지를 걸고 나오면서 이 문제 역시 장기화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이란의 정권교체를 희망하면서 "깡패국가"들에게는 군사적 용도는 물론이고 평화적 목적의 핵 활동도 허용할 수 없다는 부시 행정부의 강경 노선과, 미국의 일방주의가 이란 핵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EU 사이의 갈등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중국과 러시아는 EU을 지지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이란의 정권교체, 즉 반미정권을 친미정권으로 대체하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중동 전체를 친미 질서로 대체하고자 하는 전략적 목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향후 이라크에서 시아파가 집권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데, 자칫하면 이란-이라크 사이에 반미 연대가 태동할 가능성을 부시 행정부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시, 북핵 문제에 당분간 신경쓰지 않을 듯
이처럼 중동 문제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불확실성'에 휩싸이면서, 북핵 문제의 장기화도 불가피해지고 있다. 중동 질서가 극도로 불안해지면 질수록 미국이 외교적·군사적 역량을 한반도에 돌릴 수 있는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는 우선적으로 중동에 힘으로 쏟으면서 북핵 문제의 조기 해결에 관심을 두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것처럼 이라크가 안정화될 가능성도, 이란의 정권 교체에 성공할 가능성도 극히 낮은 반면에, 북핵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라는 미국 안팎의 목소리는 커질 것이라는 점에서 2기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도 혼돈에 혼돈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1기 부시 행정부 때에는 이라크 사례가 큰 영향을 주었다면, 2기 때에는 이란의 사례가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EU는 중국, 러시아의 지원하에 미국이 배제된 상태에서 이란과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미국이 이에 불만을 표하면서 이란 핵 합의는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이는 북핵 해법과 관련해 상반된 교훈을 주고 있다. 하나는 미국이 배제된 상태에서 한·중·일·러와 북한 사이에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배제는 핵 합의의 취약성을 잉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이 핵 포기의 상응조치로 요구하는 내용들의 상당 부분은 미국만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란의 사례는 북한으로 하여금 북미 중심의 협상 구도에 더욱 집착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동시에 이란이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수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포기를 시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대(對) 이란 정권교체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북한의 대미 의구심을 더욱 자극하게 될 것이다.
결국 부시의 목적은 핵문제를 구실로 삼아 "악의 축" 국가들의 정권교체를 추진하는데 있다는 인식을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해볼 때, 북핵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면서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지연은 '현상유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북미 양측에서 '6자회담 무용론'이 힘을 얻을 것이고, 북한의 핵무장 여부 및 그 수준은 더욱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 것이며, 북한인권법,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구상(PSI), 미국의 한반도 안팎의 군사력 증강 등 미국의 대북강경책은 구체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시의 일방주의, 한계에 봉착할 듯
그러나 앞날이 불안한 것만은 아니다. "악의 축" 국가들을 상대로 한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가 계속될수록,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 악화와 고립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특히 최근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주요 국가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제약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북핵 문제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기 부시 행정부가 1기에 이어 북한과 협상하는 척 하면서 '다른 음모'를 꿈꾼다면, 한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과의 마찰은 불가피해질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가 재선하자마자 '북핵 해법'으로서 무력 사용은 물론이고 제재와 봉쇄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이와 같은 입장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부시와 가장 가까운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 역시 미국의 대북강경론은 자신이 임기 내에 실현하겠다는 북·일 수교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일 간의 협력도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2기 부시 행정부가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 비타협주의와 일방주의를 강화하면 할수록 동북아아시아에서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고립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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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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