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90회

등록 2005.01.04 08:00수정 2005.01.0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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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면귀는 의자를 끌어 당기며 통천신복의 맞은편에 앉았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손바닥 보듯 안다는 신복(神卜)이 맞군.”
그는 말과 함께 품속에서 손톱만한 금덩이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노부의 점을 좀 봐 주시겠소?”


통천신복의 두 번째 원칙.
그는 선불을 받지 않으면 점을 봐주지 않는다.

하지만 호면귀의 말에 통천신복 구효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부는 돌덩이를 받고 점을 쳐주지 않소.”

그 말에 호면귀는 과장스럽게 정색을 하면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허...무슨 말이오? 아무렴 노부가 신복의 점을 보면서 돌덩이를 냈다는 말이....”

호면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통천신복 구효기 곁에 앉아 있던 흑의 무복의 사내가 나무로 만든 젓가락으로 호면귀가 내놓은 금덩이를 지긋이 누르자 가루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루는 대부분 돌가루였다. 돌덩이에 금을 입힌 금덩이로 누구라도 알아내기 힘든 것을 구효기는 한눈에 알아 본 것이다.

“하하... 좋소. 좋아....누구라도 신복의 눈을 속이기 힘들다 하더니....노부는 정말 당신이 신복인지 시험해 보았소. 사과드리리다.”


그와 동시에 그는 다시 품속에서 조금 전과 똑같은 금덩이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 행동과 말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누가 보더라도 자신이 구효기를 속이려 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시험해 보았다는 교묘한 언변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제는 봐 주시겠소?”


통천신복의 시선은 금덩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면귀의 얼굴에 가 있었다. 오십이 넘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청수한 그의 얼굴에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노부는 당신의 복채(卜債)를 받지 않겠소.”

그 말에 호면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과 함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마 호면귀는 이러한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사기꾼은 자신의 사기가 탄로 났다 하더라도 절대 이런 표정이나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통천신복에게 내놓은 복채를 돌려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소제가 한번 시험해 보았기로서니 신복께서 이럴 것까지야 없지 않소.”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다. 자신에 대한 호칭도 이제는 노부가 아니라 소제다.

“노부는 그저 있는 그대로 점을 볼 뿐이고 당신이 오늘 안에 죽는 것은 변하지 않소.”

통천신복의 세 번째 원칙.
곧 죽을 사람에게는 복채를 받지 않는다.

호면귀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이제는 썩은 돼지간 색깔로 변했다. 통천신복이 복채를 받지 않겠다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호면귀는 자신을 진정시키면서 노기를 띠웠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오늘 안에 죽는다는거요?”

그 말에 구효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갑신년(甲申年) 오월(五月) 구일(九日) 해시(亥時) 생으로 올해 나이 마흔 아홉이오.”

구효기의 말에 호면귀는 자신의 허울 좋은 가면을 벗어 버렸다. 이제는 평생 쓰고 있던 가면을 던져 버리고 수십차례 얼굴색이 변화했다.

“어.....어떻게 내 사주(四柱)를 알고 있소?”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해와 시를 말할 때마다 바꾸었지만 그 말 들 사이에 공통점을 찾아 보면 당신의 사주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아무리 천하의 사기꾼이라도 말과 말 사이에는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야 거짓말이라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리고 말을 많이 할수록 세심한 주의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말 속에 사실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좋소....소제 사주를 알고 점을 봐 준 것이라 생각하겠소. 하지만 소제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사람이 이 세상에는 수만명이 넘을거요. 그럼 그들이 모두 오늘 안에 죽는단 말이오?”

그의 반박에도 일리는 있다. 사주에 따라 죽고 산다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사람은 동시에 죽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반박에도 구효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사주는 인생에 있어서 행과 불행의 시기를 파악하는 하나의 열쇠와 같소. 또한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 온 인생을 알려주는 실상이고,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자신의 위험을 나타내 주는 표식과 같소.”

얼굴은 변한다. 항상 자기 자신을 거울로 보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얼굴이 변한 것을 느끼곤 한다. 즐거운 일이 계속될 때에는 자신이 보아도 왠지 밝아진 자신을 보기도 하고 괴로운 일이 지속될 때에는 일그러져 보이기도 한다.

“...... ?”
“사람에게 있어서 사주는 인생의 주기에 따라 좋은 시기와 어렵고 위험한 시기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오. 당신의 사주는 금년 칠월부터 구월까지 극히 위험한 시기이오. 물론 당신의 사주와 같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그 위험한 시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해 넘기느냐가 그 사람의 부(富)나 지위(地位) 그리고 수명(壽命)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오.”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소.”

“그럴 것이오. 하지만 오늘 당신은 그 위험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소. 당신 생각에는 생명줄을 잡고자 이곳에 왔지만 당신은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소. 당신이 모르는 가운데 당신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당신이 가진 생명선은 이미 끊어진 상태요.”

보통 사람들도 죽을 때가 된 사람을 보면 대충 죽음을 느끼곤 한다. 점을 치는 사람이라면 얼굴상만 봐도 짐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

자신이 죽을 것이라 단정하는 사람에게 기분 좋게 대할 사람은 없다. 호면귀는 침을 튀며 고함을 치다 갑자기 구효기의 목줄기를 잡기 위해 손을 뻗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 뿐이었다.

“헉....!”

그는 움직이기도 전에 생각을 멈춰야 했다. 통천신복 구효기의 옆에 앉아 있던 흑의무복의 사내의 검이 탁자위에 놓인 호면귀의 손을 비스듬히 누르고 검 끝은 그의 목젖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더욱 빨리 죽을 수도 있소.”

구효기의 냉정한 말이었다. 오늘 호면귀 사량은 자신의 교활한 세치 혀와 누구나 감탄하는 임기응변이 모두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사실 그는 사흘 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쫒기고 있었다. 그리고 쫒기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사람이 번잡한 이곳을 찾았고, 살기 위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효기의 말대로 자신은 현명하게 위험과 위기를 대처하지 못했는지 몰랐다.

호면귀는 자신이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그는 그를 쫒고 있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지독하고 위험한 자들이라 판단하고 그저 도망하기 급급했었다. 그는 스스로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구거사는 천하제일의 신복이오.”

호면귀의 얼굴색이 점차 정상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기꾼이라는 악명(惡名)이지만 어느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내면을 먼저 다스리지 못하면 절대 남 위에 설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살길을 찾아 주시오.”

그는 품속에서 금 몇덩이를 꺼내 탁자 위에 내 놓았다. 그의 손을 누르고 있던 흑의무복사내의 검은 언제 치워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통천신복 구효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이 살 길은 없소. 내 점괘는 당신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이오. 다만...”
“다만...뭐요?”

살기 위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호면귀는 다급하게 물었다.

“당신이 속해 있는 조직과 당신을 믿고 있는 사람을 배반하고 죽느냐 아니면 명예롭게 죽느냐 하는 선택만 남아 있소.”

구효기의 말은 냉정했다. 어차피 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호면귀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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