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대를 옮길 위기에 처했던 <베스트극장>MBC
그 다음으로는 폐지나 조기 종영의 사전 단계나 완화의 수준으로 시간대의 이동을 들 수 있습니다. MBC의 경우는 <베스트극장>이 대표적입니다. 실력 있는 드라마 작가와 연출자 배출의 산실로 자리잡아온 <베스트극장>도 개편을 둘러싼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방송 시간을 금요일 밤 9시 55분에서 토요일 밤 11시45분으로 옮긴다는 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옮기는 이유는 역시 낮은 시청률과 그에 따른 광고 판매 부진이었습니다. 드라마국 PD들은 MBC측이 '베스트극장'을 끝내 고사시키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는데요. PD들로서는 시청률 부진을 이유로 '오픈드라마-남과 여'를 없앤 SBS의 전례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강력한 반대로 3월 개편에 다시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KBS2의 경우에는 드라마 <반올림>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학교> 시리즈 이후 2년만에 어렵게 부활한 KBS의 정통 청소년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가 특징적인 것은 대다수 청소년 드라마가 고교생을 극화한 것과 달리 <반올림>은 중학생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년기와 사춘기 사이의 징검다리를 차지하는 중학생에 주목한 것입니다.
지난 7월 민언련의 '시청자에게 추천하는 프로그램'으로, YWCA의 '청소년 모니터가 뽑은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방송의 공영성을 뒷받침하는 대표적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공익성과 유익함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도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토요일 오후 5시 50분에서 일요일 8시로 옮겨버려 많은 청소년들이 볼 여지를 줄였습니다. 대신 그 시간대는 오락 프로그램(<대한민국 1교시>)이 차지했죠.
시간대를 옮기는 것은 폐지의 수순으로 가는 단계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즉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시간대로 이동시키고 그렇게 되면 더욱 사람들이 안 보게 되니 폐지할 명분이 생기는 것이죠.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조기 종영이나 폐지가 이처럼 빈번해진 것은 시청률과 수익성 악화의 연결 고리 때문입니다. 방송사의 수익성이 저조, 계속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방송사들이 올해 지속된 경기 침체로 인한 광고 수입 급감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MBC의 경우 올해 광고 수입이 2003년보다 15∼20% 가량 하락한 것으로 알려졌고, KBS는 연말 결산에서 마이너스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청률이 높으면 광고가 많이 붙게 되니 시청률이 저조한 프로그램은 일치감치 종영 혹은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주장들이 강해지면서 의미 있는 프로그램들이 쫓겨나거나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시청률만이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사라지게 하는가?
반드시 시청률 때문에 좋은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인식과 의지의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SBS TV <일요일이 좋다>의 '사랑의 위탁모'였습니다. 지난 3월 28일 첫 방송된 후 입양에 잘못된 부정적인 인식을 상당히 바꾸었고, 입양 계획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작진이 밝힌 바에 따르면 위탁과 입양 상담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고 새 가정으로 입양된 아이도 전년과 비교했을 때 5배 이상 증가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위탁모 활동 참여를 유도했고 이 공으로 보건복지부에서 감사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9월 25일 마지막 방송을 내보내야 했습니다. 폐지 이유는 섭외가 힘들기 때문이었는데요, 연예인들이 출연을 꺼리는 것이었죠. 특히 맨 얼굴로 아이를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3∼4주 동안 맨 얼굴을 드러내고 아기를 돌보겠다는 여자 연예인들을 섭외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꼭 여자 연예인만을 섭외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비판이 있었구요. < god의 육아일기 >처럼 남성 출연자로 확대하거나 비연예인으로 위탁모를 확대하는 방안 등을 모색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또 육아에 필요한 자문을 전문가로부터 받아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결국 폐지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방송 편성 결정자들의 의지 문제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공익성 프로그램도 외면하면 도루묵
여기에 공익성을 가진 프로그램이 정작 외면을 받으면서 오락적인 요소를 강화하다가 불행한 일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장정진씨 사건을 불러일으킨 당초 <일요일은 101%>입니다. 이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가학성 프로그램은 아니었습니다.
2003년 10월 개편에서 공익성을 강조한 오락프로그램으로 기획됐습니다. 스튜어디스 등 각종 직종을 대상으로 취업 도전 체험 같은 공익성이 강한 소재를 다루었지요. 그러나 시청률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러자 2004년 4월 오락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물벼락, 떡먹기 등 가학적인 소재가 등장했습니다.
실제로 방송이 시작된 초기인 2003년 11월 30일 8.4%(점유율 13.5%)이던 시청률은 개편 직전인 지난 3월 7일 7.8%(12.2%)로 하향세였습니다. 그러나 가학적 오락성 프로그램으로 개편한 후 상승, 그달 12일에는 12.3%(18.4%)를 기록하게 되었죠. 이러한 시청률 올리기에 맛을 들이다가 불행한 일을 만들고 만 것입니다. 결국 공익성을 가진 프로그램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습니다.
의미 있는 프로그램들이 계속 살아있게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시청률과 작품성이 모두 떨어지는 프로그램의 조기 종영 내지 폐지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정확히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평가 없이 무작정 프로그램을 조기 종영, 폐지하는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조기 종영은 뒤의 작품을 급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졸속으로 다시 질이 낮은 프로그램을 낳게 되므로 악순환을 부릅니다.
2) 끝까지 '시간의 힘'을 믿어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고두심씨에게 5번째 연기대상, 2004년 연기 대상 2관왕의 영예를 안겨준 KBS <꽃보다 아름다워>입니다. 이 드라마의 극본을 쓴 노희경 작가에게는 2년 동안 수상자가 없었던 한국 드라마 작가상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2004년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드라마에 뽑혔습니다. 이 드라마가 이렇게 성공한 것은 시간의 힘이었다는 평가입니다. 자극적인 드라마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간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워>는 사실 초반 시작만 해도 10%를 넘지 못하는 드라마였습니다. 2004년 1월 1일 방송을 시작한 후 2월 중순에야 10%를 넘었습니다. SBS <천국의 계단>, MBC <천생연분>의 기세에 눌려 수목드라마 중 시청률이 가장 낮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20%를 오르내리며 꾸준한 인기로 사랑을 받게 됩니다.
3) 2004년에는 시청자가 지켜낸 프로그램들이 화제가 되었고 이 때문에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시청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MBC 금요일 밤 교양프로그램 <사과나무>는 폐지가 결정된 상황에서 네티즌들의 거센 반대로 다시 살아난 예입니다.
<사과나무>는 지난 9월 25일 열린 제41회 ABU 프라이즈에서 청소년 부문 본상을 수상할 만큼 우수한 공익성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조한 시청률 탓에 가을 개편에서 폐지가 결정됐었죠.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청자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시청률도 상승세를 보이면서 폐지 계획이 취소됐습니다. 이렇게 시청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좋은 프로그램들을 살려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