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여행가냐? 내가 여행가지!

예니네 가족 텐트 메고 유럽가기 2

등록 2005.01.15 19:04수정 2005.01.1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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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 전도 아닌 시절에는 영어를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배웠다. 지금 사십 줄에 있는 사람들은 그 끝이 하도 날카롭고 거슬려서 잉크를 찍어서 공책에 쓸 때마다 네 줄이 그어져 있는 영어공책의 결과 함께 신경세포의 결도 소스라치며 일어나곤 하던 영어 펜글씨의 추억과 ‘디스 이즈 어 펜’으로 시작되는 저 끈질기고도 지겨운 영어수업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때부터 장장 10년 동안 수많은 수업시간과 매 시험공부시간,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따로 학원까지 다니며 천문학적인 시간과 돈을 투자했으면서도 정작 영어로 자기소개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벙어리 영어를 배운 것이 지금 사십대라 하여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직업과 환경에 따라 영어를 잘 구사하는 이도 있겠으나 거의 대부분 대졸 학력 사람들이 사전을 옆에 두기는 하지만 타임지를 읽는 수준이면서도 말은 전혀 못하는 것이 과거의 영어교육이었다.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인 큰 아이가 처음 영어를 언제부터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열이 높은 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둥 아예 말을 배울 때부터 시작해야 교육효과가 높다는 둥 하여 정말 영어 망국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어숭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제 나라 글도 제대로 못쓰는 영어영재를 어디에 쓰랴 싶어 우리 말 우리 글을 완전히 익힌 후에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옳은 일이다 고집하여 두 아이 다 여태 영어학원 한번 다닌 일이 없다. 그래도 학교에서 영어시험을 치를 때마다 100점을 자주 받아온다 하고 영어연극이나 말하기 대회도 참가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았나 싶을 뿐이다.

언젠가 한번 아이들에게 영어배우기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생각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대충 이런 것이었다.

“영어란 영국에서 시작하여 세계로 퍼져나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또한 보편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말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 말 우리 글을 제대로 못한다면 모르되 영어를 못한다 하여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영어를 못한다고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이 부끄러운 일이다.”


얼마 전에 둘째가 수업시간 과제인 영어 단막극 연습을 한다고 학교동무들과 같이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외워서 하는 것이기는 하나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저러하다면 지금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 수준으로도 마음 속의 어색함이나 수줍음만 빼내면 세계일주라도 능히 혼자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디스 이즈 어 펜' 수준이면 문제없다!


이렇듯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행에 있어서 영어 말하기란 극히 일부분일 뿐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여행에 있어서 유창한 영어 구사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여기고 유럽자동차캠핑여행을 다녀왔다 하면 맨 처음 묻는 말이 ‘영어는 되나?’이길래 짚어보자는 것이다.

a 정신없다…뮌헨 캠핑장에서 우리는 요리 중!

정신없다…뮌헨 캠핑장에서 우리는 요리 중! ⓒ 유원진

많은 이들이 영어를 못하는데 어떻게 외국에서 여행을 그것도 운전을 하고 다닐 수 있느냐고 묻는다. 맞는 말이다. 만약에 당신이 전혀 영어를, 아니 영어 단어를 모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중학교 3학년 영어책에 있는 문장들 중 절반 정도는 이해한다면, 또 보고 읽을 수 있다면, 유럽에 나가 누구와 영어로 정치나 경제 혹은 농담들을 재미있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저 캠핑장에서 하는 체크인이나 체크아웃, 물건을 사거나 길을 묻거나 전기가 안 들어와 강력하게 항의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문제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못 할 거라는, 혹은 영어는 발음부터 문법까지 잘해야 폼이 난다는 망국적인 영어숭배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의식화되어 있는 것, 바로 그 영어 열등의식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 아이들은 아빠가 영어를 아주 잘 하는 줄 안다. 유럽에서 아빠는 외국인을 만나도 전혀 거리낌없이 말하고 들으며 어떨 때는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하니 보통 실력으로는 저리 못하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영어 듣기 수업을 받는 고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는 대충 눈치를 채서 알고 있을 것이다. 아빠가 단지 씩씩함과 영어를 하찮게 여김으로써 오히려 영어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자연스러워질 뿐이라는 것을.

나는 영어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얻으면 그뿐, 그 이상 그 이하도 바라지 않는다. 여행에 있어서 그 정도는 지금 ‘디스 이즈 어 펜’ 수준이라 해도 몇 달 준비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한 것이며 만약에 아이들이 중학생 혹 고등학생이라면 온전히 그네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오히려 여행을 아이들의 영어회화 실력향상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출발할 때 4개국 여행회화 책을 한 권 샀다. 꼭 필요한 말인데 모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고 이탈리아에서는 한번 이탈리아 말로 멋지게 인사라도 해보자는 소박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에서 큰 아이가 몇 번 들척여 보았을 뿐 한번도 써먹지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모든 곳에서 그야말로 ‘디스 이즈 어 펜’ 수준으로 다 해결될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의 반복이었으며 간혹 가다가 조금 깊은 내용이 필요할라치면 시제 순서 다 무시한 단어 나열로도 그들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유럽에선 영어 해도 답답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습관처럼 ‘스픽 슬로우리(Speak slowly)’를 입에 달고 다녔다. 나는 그래도 전혀 부끄러울 것도 답답할 것도 없었다. 늘 초조해 하고 답답해하는 것은 그네들 쪽이었다.

가끔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오히려 영어를 너무너무 못하는 유럽인들 때문에 속이 터졌다. '훼얼 이즈 캠핑'을 여러 번 귀에 대고 얘기해도 못 알아듣는,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게 웃기만 하는 프랑스의 어느 고등학생 때문에 속이 터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묻다가 지쳐 숙소로 돌아와 애꿎은 대사관에 넋두리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나의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이곳의 영어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들의 영어실력은 칭찬할 만하다 하겠다. 대부분 아주 간단한 영어는 알아듣되 단지 수줍음을 많이 타거나 나서기를 꺼리는 까닭에 잘 말하지 않을 뿐 일반국민들의 기초영어회화 수준은 아마 세계 제일의 수준이지 싶다.

a 으~ 프랑스에서는 영어도 안 통해! 답답하니까 콜라나 한잔 쭉~

으~ 프랑스에서는 영어도 안 통해! 답답하니까 콜라나 한잔 쭉~ ⓒ 유원진

자 이쯤에서 영어 때문에 자동차 캠핑여행은 못한다는 핑계는 접어두고 또 영어 한번 근사하게 하고 싶다는, 쓸 데 없으면서 불가능하기까지 한 욕심 같은 거 버리자.

그냥 오다가다 흔해 빠진 그러나 테이프까지는 있는 여행영어회화 책 한 권 마련하는 것으로 유럽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차고도 남게 준비완료한 것이 된다.

그 다음에는 두둑한 배짱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별로 잘하지는 못한다 하는 태연함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기야 내버려두어도 아이들이 다 알아서 하기는 하지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올 때 취리히 공항에서 차를 돌려줘야 하는데 영국인 탁송기사와 길이 어긋났다. 다행히 시간은 여유가 있었으나 반납할 때까지는 사용자 책임이라 은근히 걱정이 되어 공항 도우미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고는 뭐라 그러는데 아마 내가 장소를 잘못 찾았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에서는 대충 들으면 안 되는지라 나는 미심쩍은 부분을 몇 번 되물었고 드디어 그녀는 말로는 안되겠는지 종이를 가져다가 약도를 그려주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구별 식구들에게 영어를 못해서 당신들을 만나러 못 간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여행은 내가 하는 것이지 영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창하게 잘 하면야 좋기는 하지만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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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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