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메주를 매단 모습을 보기도 그리 쉽지 않다이종찬
메주의 역사는 정말 오래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메주의 어머니 격인 막며주, 즉 '말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철기시대 말기에서 원삼국 시대(마한, 진한, 변한) 초기였다고 하니, 메주는 예로부터 우리 나라 역사와 함께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메주의 역사가 곧 우리 조상들의 삶의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막며주로 담근 말장을 '메주' 혹은 '미순'이라고 불렀고,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막며주를 '말장' 혹은 '며주'로 부르고, 그 막며주로 담근 장을 '감장(甘醬)' 혹은 '간장(醬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지금 간장과 된장으로 나눈 것은 아마도 그 뒤의 일이리라.
"옴마!(엄마)"
"와?(왜)"
"아까부터 가마솥에서 눈물이 몇 번이나 흘렀다. 인자(이제) 메주콩이 다 삶긴 거 아이가?"
"와? 삶은 메주콩을 그리도 묵고 싶나? 쪼매마 더 기다리거라. 다 삶기고 나모(나면) 니(너)부터 제일 먼저 한 그릇 퍼주께."
얼마 전 양산 배냇골에 가다가 배냇골 들머리에 있는 마을 담장 너머에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볏짚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그 메주를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어린 날 우리집에서 메주를 만들던 그 정겨운 풍경이 마치 영사기에서 흑백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차르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 마을 어머니들은 겨우내 먹을 김장을 다 담그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메주쑤기였다. 내 어머니께서는 메주를 쑤기 며칠 전부터 지난 가을 밭에서 거둔 메주콩을 꺼내 돌과 이즈러진 메주콩이나 잡티 등을 골라냈다. 그리고 이른 새벽 갓 길러온 우물물에 메주콩을 깨끗이 씻은 뒤 그 물에 메주콩을 하루 정도 담가 두었다.
▲메주는 볏짚으로 묶어야 발효가 잘 된다이종찬
그 다음날 이른 새벽, 어머니께서는 다시 우물물을 새로 길어와 물에 불은 메주콩을 한번 더 헹군 뒤 가마솥에 넣고 삶기 시작하셨다. 그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독에 어제 길러온 물이 조금 남아 있는데도 왜 하필이면 이른 새벽 우물물을 다시 길어와 그 물에 메주콩을 삶는가 하고.
"예로부터 그 집안을 보려면 장맛부터 먼저 보라 캤다. 신의 음식이라카는 장을 담그는데 이만한 정성도 안 들이모 우찌 되것노. 밥을 지을 때도 항상 이른 새벽 새로 길어온 우물물을 쓰야 밥맛이 나는 기다."
"그라모 모든 음식맛은 물맛이라 이깁니꺼?"
"그걸 말이라꼬 하나. 특히 일년 내내 우리 가족들이 묵어야 하는 장은 물맛도 좋아야 하지만 정성이 더 중요한 기다."
우리 마을에서 메주쑤기를 하는 날은 마치 잔칫날 같았다. 나와 동무들은 그날만큼은 잘 삶은 고소한 메주콩을 맘껏 먹을 수가 있었고, 마을 아저씨들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메주콩을 절구통에 쿵쿵 찧었다. 마치 작은 설날 찰떡을 치는 것처럼 그렇게. 또 절구가 절구통에 떨어질 때마다 고소한 메주콩 내음이 우리 마을을 감쌌다.
내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잘 찧은 메주콩을 떠내 햇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아이 머리통만한 메주를 수없이 만들었다. 신기했다. 절구통에서 마악 떠낸 메주콩 반죽에 어머니의 손이 닿기만 하면 눈 깜빡할 새 머리가 둥그렇고 몸이 사각 진 톡특한 모양의 메주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만든 메주를 열십자로 묶은 볏짚으로 묶어 끝자락에 새끼줄을 꼬아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때부터 나와 형제들은 입이 심심해질 때마다 메주에 박힌 콩을 한 알씩 빼먹곤 했다. 그렇게 조금 마른 메주콩을 씹으면 쫄깃쫄깃하면서도 고소한 뒷맛이 아주 좋았다.
"누가 메주를 곰보로 만들어놨노? 배 앓이 할라꼬."
"맛만 좋은데예?"
"인자(이제)부터는 빼 묵지 마라. 곰팡이가 슬어가는 그기 머슨 맛이 있다꼬 자꾸 빼 묵노. 정 입이 심심하모 고매 뺏대기(생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것)나 묵어라."
"고매 뺏대기는 돌덩이 같아가꼬 잘못 묵다가는 이빨 뿌러질 수도 있습니더."
"아, 쇠로 삼키도 소화시킬 그 나이에 그깟 고매 뺏대기 하나도 못 묵는다 그말이가? 남들은 그것도 없어서 못 묵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보름 정도 메주를 처마에 매달아 말린 뒤 푸르스럼한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면 메주를 떼내 지게 작대기 같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매단 나무 막대기를 안방으로 옮겼다. 그것도 안방에서 가장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는, 명당자리에 말이다.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살갑다이종찬
그때부터 안방에서는 겨우 내내 발내음 비슷한, 구리한 메주 뜨는 내음이 감돌았다. 나와 형제들은 밥을 먹으러 안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메주 뜨는 구리한 내음 때문에 코를 틀어막곤 했다. 하지만 내 부모님께서는 안방 아랫목에 놓아둔 메주에서 구리한 내음이 많이 날수록 장맛이 좋아진다며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하셨다.
"올(오늘) 또 된장국입니꺼?"
"야가(이 아이가) 지금 머슨(무슨) 소리로 하노. 조선 사람은 된장을 묵어야 힘을 쓰는기라. 그라고 된장 이기 사람 몸에 울매나(얼마나) 좋은 긴 줄 아나?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다카이."
"오데 그뿐인교? 된장이 없었으모 만날 밑반찬을 우째 다 만들낀교."
그래. 된장은 김치와 더불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식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과학적으로도 발효식품인 우리나라의 김치와 된장이 으뜸 가는 영양소를 가진 거의 완전에 가까운 음식이라고 하지 않은가. 기왕 메주와 된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늘 저녁 식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끓여볼까나.
| | 메주 잘 만드는 법 | | | | 뛰어난 간장이나 된장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메주를 만들어 잘 숙성시켜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메주를 만드는 사람의 정성. 정성이 담겨 있지 않은 메주는 아무리 모양을 번지르르하게 잘 만들어도 감칠맛 나는 장맛을 얻을 수 없다.
1. 좋은 메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 땅에서 자란 빛깔이 곱고 알이 토실토실한 메주콩을 골라야 한다.
2. 메주콩을 맑은 물에 하룻동안 충분히 불린다.
3. 물에 불린 메주콩을 솥에 넣고 밥을 짓듯이 맑은 물을 적당히 붓고 삶는다. 이때 삶긴 메주콩 한두개를 솥에서 꺼내 손가락으로 비벼 쉽게 뭉그러질 때까지 삶아야 한다(메주콩이 덜 익으면 장맛이 떨어지고, 너무 익으면 단백질이 분해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4. 삶은 메주콩을 소쿠리에 담아 물기를 잠시 뺀 뒤 뜨거울 때 빻는다. 청국장을 만드려면 물기를 뺀 콩을 짚으로 감싼 뒤 따뜻한 곳에 3~4일 정도 두면 된다.
5. 빻은 메주콩으로 메주를 빚는다. 메주를 빚을 때는 조금 얇게 빚어야 발효가 골고루 잘 된다. 메주콩 1되로 메주 2~3개 정도가 적당하다.
6. 메주는 겉이 완전히 굳도록 햇살에 잘 말린다. 두껍게 만든 메주는 속이 약간 갈라질 정도로 바싹 말리는 것이 좋다.
7. 마른 메주에 짚을 깔고 서로 붙지 않게 잘 덮어서 따뜻한 곳에 둔다. 2주일 정도 지나면 메주의 겉에 곰팡이가 덮인다.
8. 알맞게 뜬 메주는 볏짚으로 열십자로 묶어 봄이 올 때까지 안방에 매달아 두거나 선반 위에 올려 둔다.
9. 햇살 맑고 따뜻한 봄이 오면 메주를 꺼내 햇빛에 바짝 말린 뒤 깨끗한 물에 헹궈 소금물이 담긴 장독에 숯과 붉은 고추를 함께 넣어 장을 담근다. / 이종찬 기자 | | | | |
덧붙이는 글 |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재기사 <내 추억속의 그 이름>을 오는 27일로 끝내고, 31일부터 새로운 연재기사 <음식사냥 맛사냥>이 나갈 예정입니다. 앞으로 <서울일기>는 연재기사가 아닌 '사는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더 큰 사랑과 따스한 매질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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