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해이? 그럼 우리보고 죽으란 말이냐"

[진단] 극빈층 신용불량자 눈에 비친 '도덕적 해이론'

등록 2005.01.18 21:16수정 2005.01.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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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례 1 : 기초생활수급자 신용불량자

a 25일까지 신용불량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길거리로 내쫓길 처지에 처한 고양금 할머니. 그는 "제발 살 공간만이라도 남겨달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25일까지 신용불량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길거리로 내쫓길 처지에 처한 고양금 할머니. 그는 "제발 살 공간만이라도 남겨달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 오마이뉴스 이성규

"도덕적 해이 때문에 안된다구요? 그러면 죽으라는 말인가요."

경기도 안산시 주공 영구임대 아파트에 사는 고양금(72)씨. 고씨는 사회적 관심 대상인 이른바 독거노인일 뿐 아니라 매달 21만원을 정부로부터 보조받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다. 하지만 고희를 넘긴 나이에 그는 1억원에 가까운 연체금 때문에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혔다. 물론 고령에 일자리도 마땅치 않아 벌어서 빚을 되갚을 수도 없는 처지다.

얼마전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경고 고지서가 한장 도착했다. 오는 25일까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단전·단수조치가 취해진다는 것이다.

고씨가 신용불량자에 이르게 된 경위는 이렇다. 지난 2001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목 디스크 때문에 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 병원비를 카드로 긁은 것이 화근이 됐다. 당시 병원에서는 건강보험 비급여대상인 MRI 촬영을 권고했고 고씨는 그대로 따랐다.

이런 저런 치료를 받은 결과 그가 받아든 영수증 본인 부담금 칸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금액이 찍혀있었다. 당장 목돈이 없었던 고씨는 카드할부로 결재를 한 뒤, 매월 '카드 돌려막기'로 월부금을 메워나갔다.

그러던 차에 고씨는 '납골당에 투자하면 상당한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한 회사의 말을 믿고 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 투자했다가 고스란히 사기를 당했다. 카드값이라도 벌어보려던 애초 계획은 되레 거액의 부채로 되돌아왔다. 당시 고씨처럼 사기를 당한 부녀자만 무려 6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결국 4000만∼5000만원에도 미치지 않던 원금은 1∼2년을 거치면서 불어나더니 결국 9000만원에까지 이르렀다. 집안 곳곳에 가압류 딱지가 붙기 시작했고, 급기야 임대아파트 보증금에도 가압류가 들어왔다. 주공은 이를 이유로 임대계약 갱신 거부를 통지해 왔고, 퇴거처분까지 취했다. 고씨는 오는 25일까지 가압류 처분을 풀지 못하면 길바닥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a 고 할머니에 날아온 명도요청서. 25일까지 퇴거하지 않으면 단전조치를 취하겠다고 적혀 있다.

고 할머니에 날아온 명도요청서. 25일까지 퇴거하지 않으면 단전조치를 취하겠다고 적혀 있다. ⓒ 오마이뉴스 이성규

고씨는 요즘 9시 뉴스를 빼놓지 않고 본다고 한다. 정부의 신불자 대책이 어떤식으로 가닥이 잡혀가는지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가끔 이헌재 부총리의 "원금 탕감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한다.


특히 '도덕적 해이'라는 말이 등장할 때마다 혈압이 오른다고 했다. 고씨는 "말하기 쉬워서 그런 말을 하지 우리같은 서민 중에 누가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서민은 죽으라는 말로 들린다"며 "정치인들은 수십억씩 비리를 저지르고도 처벌도 제대로 안받는데 정말…"이라며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고씨는 또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를 왜 이헌재 부총리가 어겨가며 원금탕감을 못해준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인지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분노를 토해냈다. 그는 "나도 빚을 갚고 싶지만 이 나이에 취직도 시켜주지 않아 돈을 벌 길이 없다"며 "나같은 사람은 죽으라는 말이냐"고 말했다.

고씨는 "정부로부터 받고있는 21만원의 지원금으로 임대료를 내고 생활하고 있지만 더이상 버티기는 힘들다"며 "주공은 25일까지 나가지 않으면 단전·단수조치를 취한다고 하는데 제발 집에 살 수 있도록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 사례 2 : 신용불량에 따른 가정파탄

신불자 10명 중 6~7명 가정불화 경험

지난해 11월 18일부터 26일까지 8일간 신용회복위원회가 신용불량자 177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김정은(가명)씨처럼 신용불량등록 뒤 이혼을 한 사례는 6.4%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불화를 경험한 바 있다는 응답은 65.9%였고, 별거중이라는 응답(4.6%)도 적지 않았다. 또 가족 중에 신용불량자가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58.6%였고, 이 가운데 김씨처럼 배우자가 신용불량자인 경우는 30.4%로 집계됐다.

채무발생의 원인은 사례1의 고양금씨처럼 병원비 때문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7.1%였으며 대부분이 생활비(30.2%) 때문이라고 답했다. 교육비 때문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8.9%, 사업부진 때문이라고 밝힌 응답자는 21%나 됐다. 또 사기피해로 인한 신불자 등록 경우도 5.3%로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미술학원 강사였던 김정은(35. 가명)씨는 수천만원에 달하는 남편의 빚을 대신 떠안는 바람에 신용불량자가 된 경우다.

지난 2003년 신불자로 등록된 김씨. 전 남편이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로 여러 장의 카드를 발급 받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김씨는 전 남편이 현금서비스로 빼내 쓴 금액이 이렇게 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의 명의로 수천만원에 달하는 사채를 빌려쓰기도 한 사실을 알게됐을 땐 정말 하늘이 무너져내린 것같은 심정이었다.

결국 남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씨는 이혼을 선택한 뒤 집을 나왔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끈질기게 괴롭혔다. 사채업자들은 김씨를 향해 '술집에 나가서라도 돈을 갚아라'는 등 막말을 퍼부을 정도로 악랄하게 부채상환을 요구해왔다. 사채업자들의 눈을 피해 김씨는 아들과 함께 한 자활기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씨는 일단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전 남편이 사채로 끌어쓴 5000여만원은 막아냈다. 하지만 3000여만원에 달하는 카드빚 등이 현재도 김씨를 옭아매고 있다. 배드뱅크를 활용해 신불자 딱지를 떼려고 애도 써봤지만 아이 양육비 등을 감당할 수가 없어 곧 포기하고 말았다.

새벽엔 목욕탕 청소, 낮엔 학습지 강사, 저녁엔 신문 삽지 넣기 등 악착같이 부지런을 떨어보기도 했다. 그래도 정작 한달에 50만원을 손에 쥐기도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3000여만원이라는 거액을 갚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자를 물지 않는 조건으로 한푼도 쓰지 않고 5년 동안 꼬박 모아야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씨는 '도덕적 해이 때문에 원금 탕감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최근 이헌재 부총리의 발언에 대해 분노를 토해냈다. 김씨는 "그것은 정말 탁상공론"이라며 "공무원이 제도를 악용할지는 몰라도 우리같은 서민들은 하라고 해도 못한다"고 울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원금을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면서 "정부가 밑바닥 분위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울먹거리기도 했다.

[정부·여당의 저소득층 신용불량자 대책] 정부는 현재 신용불량자 해소를 위한 3단계 해법을 마련 중에 있다. ▲국민기초생활보호 대상자 ▲청년층 채무불이행자 ▲생계형 영세자영업자 등 세갈래로 분류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소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 방안에 저소득층 신불자들이 기대하는 원금 부분 탕감 방안이 담기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지난 14일 정례브리핑에서 "원금탕감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도 정부쪽 대안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임채정 열린우리당 의장도 지난 18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홍재형·강봉균·이계안 의원 등 당내 보수파 의견을 받아들여 신불자 재활을 위한 공적자금 투입 가능성을 배제했다. "원금탕감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헌재 부총리의 주장과 보조를 맞춘 셈이다.

임 의장은 "도덕적 해이 문제도 무시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 공적자금을 쓰기도 쉽지 않다"며 "정부가 후속조치를 논의해서 신용불량자에 대해서는 구제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기술적인 문제는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금융기관들과 보수언론들도 저소득층의 도덕적 해이 등을 이유로 원금탕감 방안을 도입해서는 안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신불자 대책이 과연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길거리 신용불량 상담소를 통해 신불자와 직접상담에 나서고 있는 이선근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은 정부의 대안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본부장은 "현재에도 채무상환이 지급불능 된 채무자들이 개인파산을 신청할 경우 적극적인 채무조정과 면책결정이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극빈층 신용불량자들에게 조차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면서 소극적 대책으로 일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했다.

"제일은행 살리는 돈이면 신불자 문제 해결할 수 있다"
[인터뷰] 이선근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 본부장

▲ 이선근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 (자료사진)
ⓒ오마이뉴스 이종호
올초부터 길거리 신용불량자 상담소를 직접 챙기고 있는 이선근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 당내에서 민생문제통으로 통하는 이 본부장은 18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저소득층 신용불량자 원금 탕감에 난색을 표하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 "신용대란의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의도"라며 정면 비판했다.

그는 이헌재 부총리를 "오늘날 신용대란의 주범"이라고 지목한 뒤 "이 부총리는 신불자 대책을 후퇴시키기 위해 지금도 시간벌이와 물타기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다음은 이선근 본부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정부가 저소득층 신불자의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원금 탕감에 반대하고 있다.
"2년전 KDI 연구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신불자의 95%가 생계형 원인에 의한 신불자다. 지금 정부는 95%의 생계형 신불자를 구하려 하기보다는 5% 때문에 95%를 죽이는 정책을 쓰고 있다. 특히 정부는 과거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이라는 잘못된 정책의 원인과 결과를 덮으려고만 하는 것 같다. 특히 이헌재 부총리 라인이 신용대란의 주범이다. 자기 책임을 벗어나려는 의도가 짙다고 본다."

- 이종구 한나라당 의원이나 참여연대 등은 1000만원 이하 탕감 주장을 하는데.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도 여기에 동조한 바 있다.
"금액의 과다에 따라, 즉 크기에 따라 구체적인 정책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단 이들은 빚을 소득으로 갚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지급불능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금액의 과다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 분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정부가 원금 탕감정책을 기피하는 것은 신불자 실태조사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나.
"실태조사는 다 돼있다. 하지만 이 실태 조사에 근거한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국자가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것이 문제다. 조작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본다. 또 금융기관의 책임회피가 정책입안을 못하도록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소득층에 대한 일부 원금탕감을 시사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헌재 부총리로 넘어오면서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했다. 이헌재 부총리는 (신불자 대책을 희석시키기 위해) 시간벌이와 물타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 과정이 신불자를 '도덕적 해이에 빠진 사람'으로 낙인찍는 과정이다. 이런 방식으로 3년 동안 반복됐다."

- 민주노동당은 신불자 해소에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보나.
"정부가 통계를 세밀하게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은행연합회 집계 등에 따르면 전체 신불자의 가계부채 500조원 가운데 15% 정도가 부실채권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약 75조원인 셈이다. 이 부실채권은 시장에서 대략 10% 가격에 팔린다. 만약 정부가 이 부실채권을 매입해 소각한다고 하면 소요되는 비용은 총 7.5조원이다. 즉 제일은행 하나 살리는데 들어간 돈이면 충분히 해결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팔린 부실채권이 문제다. 예를 들면 허드슨 어드바이저 코리아 같은 곳은 이미 이 부실채권을 사들여 3년 후에 추심에 들어갈 방침인가 보더라. 정부에서 팔라고 하면 높은 가격으로 넘길 수도 있다. 이럴 땐 신불자에게 곧바로 파산절차를 밟으라고 조언하면 쉽게 풀릴 수 있다. 당장 허드슨도 싼 값에 채권을 판매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니면 그들이 한푼도 못받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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