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
"자식들에게 남겨 두려고 쓴 건데요. 내가 죽더라도 역사 속에서 살았던 기록은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종점청과'라는 낡은 간판이 걸린 '과일가게' 뒤에 딸린 단칸방에서 장기수 나경운(78) 선생이 볼펜으로 꼭꼭 눌러 쓴 원고뭉치를 들어 보이며 한 말이다.
기자가 나 선생을 처음 본 건 지난해 12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노상 단식이 진행되던 여의도 국회 앞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거나 기자회견 때 앞에 나선 적이 단 한 차례도 없고, 그저 묵묵히 칼바람 부는 여의도 농성장에 날마다 나와 한 자리를 지켜낼 뿐이었다.
'누굴까'하는 생각하며 농성장 천막 안에서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었다. 한 2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범상치 않은 인생역정을 털어놓으며 "내가 살며 겪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거짓없이 글로 적은 게 있다"는 거였다.
당시는 취재할 경황이 없는 상태였기에, "글을 보고 싶은 데, 빠른 시일 안에 찾아 뵙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한 뒤 헤어졌다. 그 약속은 약 한 달이 지나서야 지키게 됐다.
1928년 전남 나주군 세지면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941년 2년제 간이학교에 들어갔다가 다음해(1942년) 포악한 일본인 선생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가담한 것 때문에 퇴학 당했다.
정규교육이라곤 겨우 1년 밖에 받은 적이 없는 선생이 감옥살이를 하면서 터득한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기록한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평등한 사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좌익 활동"
"글을 쓰다보니 몸살이 다 났어요. 내가 한 넉달 동안 집 밖에도 잘 안 나가고 썼는데, 글 쓰는 게 그렇게 고되더라고."
어려서부터 이삭줍기와 품팔이를 하면서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힘겨운 노동을 했던 그는 1945년 해방되던 해 10월 부락민청동맹원으로 가입했다. "워낙 없이 살아왔기에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좌익 쪽에서 활동했던 것"이었다. 이 '평등한 사회'에 대한 꿈 때문에 그가 겪은 인생의 고통은 말 그대로 격동의 한국현대사와 고스란히 일치한다.
1946년 10월 이후 비합법활동을 주로 했던 그는 1948년 초 서촌 부락에 조직을 세우려고 머슴살이 등으로 위장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1949년 초 당시 고향에서 우익단체 간부였던 당숙에게 자수한 뒤, 1949년 10월 '보도연맹'에 가입해 통제를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다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인민군이 후퇴할 무렵인 11월경 지리산에 입산했다. 빨치산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잘 알려진 '무장유격대'가 아닌 '생산유격대'였다. 빨치산 활동에 필요한 물자인 쌀이나 콩 등 식량은 물론이고, 신발, 필기도구, 잉크, 종이 등을 보급하는 게 주요 '임무'였다.
생산유격대 생활도 오래가진 않았다. 좁혀져 오는 포위망을 피하기 위해 하산하던 중 1952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구형에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군산교도소에 수감됐다.
'앞줄 사형, 뒷줄 무기'하는 식의 엉터리 재판 속에서 다행이 전에 도움을 줬던 사람의 노력으로 사형을 면했다고 한다.
1960년 4.19후 특별조치령으로 비전향자였기에 잔형의 3분의 1을 감형 받았으며, 1962년 대전교도소에 임감돼 있던 중 1964년 6월 26일 만기출소했다.
'좌익 딱지' 붙은 요시찰 대상자의 삶
출소한 뒤 서울로 이사왔지만 '좌익 딱지'가 붙은 요시찰 대상자의 삶은 힘겹기만 했다.
"은평경찰서에서 날마다 형사가 나와 감시를 했어요. 건축 현장 경비자리 같은 변변찮은 직장을 옮겨다녔지만 그때마다 형사들이 와서 뭐라고 하니 일자리가 오래 갈 수가 없지. 뭐."
그러던 중 1973년 그는 또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됐다. 반공법 고무찬양죄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은 것이다.
"한동네 사람인데 증인을 조작해서 잡혀 들어갔어요. 그때 노점상을 했는데, 한 번은 노점상들을 다 잡아다가 구류를 때린 적이 있어요. 구류살면서 같이 있던 사람한테 내가 '이북은 노동자의 나라고 살기 좋은 나라다'고 했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래서 내가 재판받을 때 '아무렴 요시찰 대상자로 있는데, 그런 말을 했겠느냐, 명색이 요시찰 대상자인데, 죄가 겨우 고무찬양이 뭐냐'고 항의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공안기관의 요구대로 징역 3년의 형이 확정되어 그는 대전교도소 특별사동으로 보내졌다. 당시는 심리전 따위의 이른바 '특수교육'을 받은 전향공작반이 대전교도소를 비롯해 전주와 대구교도소 등지에 배치되어 폭력과 고문을 동원한 강제전향 공작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협박에 못 이겨 전향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