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쌀은 누가 다 먹었을까

[군대시절의 황당사건] 희망(?)의 90년대 초반, 군에서 배곯던 기억

등록 2005.01.27 23:16수정 2005.01.2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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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가 있으신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배 한 번 안 곯아 본 것들이…."

행인지 불행인지 93년도 초, 군에서 그럴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덕분에 누가 "밥이나 굶어 봤냐?"라고 물어 보면 지체 없이 큰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네!"라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나 배곯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60년대 군 생활하신 아버지도 굶지 않았다는 '밥'을 말입니다.

훈련소 시절.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고된 훈련으로 '악명' 높았던 곳 이지만 '밥' 인심은 넉넉했음
훈련소 시절.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고된 훈련으로 '악명' 높았던 곳 이지만 '밥' 인심은 넉넉했음나영준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를 옮기게 된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한 지역은 밝힐 수 없지만(군 기밀에 해당할까봐) 경기도 김포에 새로운 포병부대가 창설이 되었고, 여러 부대에서 약간씩의 인원을 차출하여 새 부대인원을 구성하게 됐습니다.

'짬밥'에 밀려 그 곳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아직 뭘 모를 이등병 때인지라 "새 부대면 건물도 새로 짓고 무슨 물품이든 A급이겠구나"하고 '턱도 없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기도 했습니다. 처음 배치 받았던 부대가 50년대의 군대 모습 그대로였으니 그런 희망을 품을 만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옮긴 부대는 산을 깎아 놓은 황량한 벌판, 그 자체였습니다. 연병장은 개펄이라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고 신식 건물은 골조만 올라갔을 뿐 언제 완공이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허름한 창고에서 칼잠을 청하며 "아이고, 내 팔자야"를 외쳤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만한 경험까지라면 다른 이들도 때때로 겪을 만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부대를 완성해 가는 대부분의 과정은 사병들의 몫으로 돌아왔지만, 혼자만 겪는 일도 아니고 함께 고생하는 부대원들도 있으니 체념하고 아침저녁으로 중노동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힘든 것은 그런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함께 있던 전우들의 입을 빌리자면 '환자급'에 가까운 대대장님의 과도한 애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것은 좋지만 '필요 없는' 이들에게까지 억지로 나누어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덕분에 전 부대원이 주말을 교회에 차압당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주중의 저녁까지도 하나님에게 바쳐져야 했습니다. '통성기도'란 것을 처음 본 것도 군대에서였습니다. 얼마 전 만난 군 후임병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사 닳고 닳은 지금이야 귀신을 봐도 안 놀라지만, 그 당시엔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섰다"고 합니다. 그만큼 통음(通音)이 터져 나오던 밤들은 부대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 기독교 신자와 비신자들 간에 벌어졌던 반목과 질시가 떠오릅니다. 다함께 웃던 전우끼리 고성과 주먹질이 오가던 그 때 일들이. 애초부터 불교신자인 이유로 그 싸움에서 제삼자로 한 발 물러서야 했지만 지켜보는 것이 오히려 더 괴로웠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대해 봐야, 바깥세상 역시 진흙탕이니 미리 경험하라는 대대장님의 깊은 뜻(?)이 아니었나 합니다.

어쨌건 그런 것까지도 그런 대로 참을 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대장님은 기쁨에 날뛰고 사병들은 짙은 한숨을 내뱉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부대 내에 '교회'를 짓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군단에서 약간의 예산을 얻고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결국 어지간한 일들은 사병들의 몫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알았기에 부대원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역시 군 생활을 함께 한 다른 친구는 그때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군 생활하면서 눈앞이 깜깜한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교회공사를 한다는 얘기였고, 다른 한 번은 제대말년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었다"고.

가뜩이나 일과 시간 후까지 각종 공사에 시달리는 처지라 모두 거품을 물었고, 돌아서선 세상의 흉악한(?)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병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일정은 변함없이 착착 진행 됐습니다.

교회 공사 시작 후 밥 배급량이 줄어들기 시작

그런데, 교회 공사가 시작될 즈음 정말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밥이 적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처음 며칠간은 다들 이상하다 하며 고개만 까딱거렸습니다. 그런데 며칠만의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두 살이 빠진 상태였지만 정상적인 훈련의 결과이지 못 먹어서는  아니었음
모두 살이 빠진 상태였지만 정상적인 훈련의 결과이지 못 먹어서는 아니었음나영준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반찬이 적으면 적었지 밥이 모자를 경우는 없습니다. 반찬의 경우 고기반찬, 특히 고소한 기름이 '꿀처럼' 흐르던 닭튀김 같은 경우에는 모두가 선호하고 한참 먹을 때의 나이인지라 배식을 잘 하지 않으면 양이 고르게 돌아가지 않습니다(지금은 다를지 모르지만).

고기뿐만 아니라 사실상 모든 반찬은 배식을 했었지만 적어도 밥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 정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파견근무를 할 일이 있어 많은 부대를 다녀봤지만 그것만큼은 틀리지 않은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늘 조금씩은 남겨서 잔반 처리를 했던 그 밥이 어느 날부터 적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정확히는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배급량이 턱없이 부족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각 포대(포병의 중대) 별로 상병급 고참들이 밥을 배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더 먹었으면…"하는 애원의 눈길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적은 양을 배식해 주고 나면 예닐곱이나 되던 그들은 그나마 밥을 굶거나 포대장이 사다 준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그랬다던가요. 빵을 달라는 시민들의 원성에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지"라고. 제대 후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밥을 굶었으면 P.X에서 다른 걸 사 먹으면 되지 않았냐고. 한숨을 쉬곤 신설부대에, 잠자리도 변변히 마련되지 않은 그 허허벌판에 P.X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습니다.

돈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대원들 눈이 벌개지기 시작했습니다. '굶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노동의 강도는 높아지기만 했습니다.

스스로의 입으로 과거 부처님을 믿었다가 별 '효험'을 못 봤다는 대대장님께서는 십자가 군대 앞엔 영광뿐이라며 사병들을 독려했습니다. 기독교 군종병들 입에서까지 "너무 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작업에 중단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때 '쌀'뿐만 아니라 다른 반찬들도 함께 줄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다만 '밥'이 너무나 간절한 탓에 다른 부식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부대원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부대 안에 큰(?) 쥐가 있어서 쌀을 갉아 먹는다더라, 그 쥐가 쌀가마니를 지고 도망가더라'는 믿지 못할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을 뿐 누구도 배식이 줄어든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배가 고프다는 것. 배가 고파 탈영이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긋지긋하게도 매주 토요일 점심에 자장면이 나왔습니다. 모두에게 저주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양'이 턱없이 적어서였습니다.

일반 중화요리 집에서 내오는 양의 절반이나 될까, 그리고 더해진 석 점의 단무지(운 좋으면 넉 점), 포대별로 나누어주기에도 적었던지 400여명이나 되는 부대원들에게 일일이 고참급 취사반원이 배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납니다. "깡~!'"하던 파열음을. 알루미늄 배트로 야구공을 후려칠 때 나던 소리가 식당에 울렸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 한 번 더 먹으려던 병사의 머리에 무서운 속도로 철제 식판이 날아 든 것이었습니다.

"이 ×××야. 몰래 한 번 더 × 먹으면 그거 모를 것 같아. 아주 죽여 버릴 거야!"

취사반원의 엄포에 모두들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 식당 밖에서 동기인 친구가 피워 올리던 담배연기가 생생합니다.

"90년대 군대 와서 밥 굶을 줄 몰랐다"

"세상에… 90년대에 군대 와서 밥을 굶을지 몰랐다. 밖에 나가 이 얘기하면 누가 믿어나 줄까"라며 하늘을 바라보던 한숨이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휴가를 다녀 온 고참이 부대 밖에서 김밥과 초코파이 등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눈이 뒤집히고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얼 먼저 먹어야 더 많이 먹을 수 있을까?' 머리가 핑핑 돌고 있었습니다.

초코파이. 애증(?)의 먹거리. 다시 그렇게 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다 고개를 가로 젓는다
초코파이. 애증(?)의 먹거리. 다시 그렇게 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다 고개를 가로 젓는다나영준
초코파이를 먼저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열너 댓 명의 내무반원 앞에 펼쳐진 것은 김밥과 순대 한 무더기, 그리고 초코파이가 2~3상자였습니다. 남들이 김밥을 먹는 사이 12개들이 초코파이 한 상자를 먹어 버리려고 작정했습니다.

먹는 게 아니라 던져 넣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두 개. 세 개… 미친 듯이 쑤셔 넣었습니다. 통째로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곱 개째를 입에 넣었을 때 고참이 웃으며 뒤통수를 쳤습니다.

"이 자식아, 딴 것도 좀 먹어라. 그동안 몸에 당(糖)기가 쏙 빠졌구만."

그래서 한 상자를 다 못 채웠습니다. 고참의 제지가 아니었다면 한 상자를 다 먹고도 더 집어넣었을 겁니다. 그렇게 군대 생활의 어느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너 달 후, 일반 야전부대에 어울리지 않는 늘씬하고 매끈한 교회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이 식사는 다시 제 배급량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밥도 반찬도 육군정량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얼마간은 예전처럼 잔반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굶주렸던 병사들이 걸신들린 것 마냥 먹어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새 동면을 준비하는 야생동물처럼 음식물을 '저장'해 두려는 습관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버릇을 고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어쨌건 그 몇 달간 배고픈 설움은 톡톡히 맛 본 듯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니 문득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을 한 듯합니다. 그런 '귀하고 소중한' 기회를 어디서 다시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경험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은데 도대체 누구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알 수만 있다면 인생을 배우게 해 줘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그 때, 그 많던 쌀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덧붙이는 글 | 내 군대 시절의 황당 사건

덧붙이는 글 내 군대 시절의 황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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