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 시절.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고된 훈련으로 '악명' 높았던 곳 이지만 '밥' 인심은 넉넉했음나영준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를 옮기게 된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한 지역은 밝힐 수 없지만(군 기밀에 해당할까봐) 경기도 김포에 새로운 포병부대가 창설이 되었고, 여러 부대에서 약간씩의 인원을 차출하여 새 부대인원을 구성하게 됐습니다.
'짬밥'에 밀려 그 곳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아직 뭘 모를 이등병 때인지라 "새 부대면 건물도 새로 짓고 무슨 물품이든 A급이겠구나"하고 '턱도 없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기도 했습니다. 처음 배치 받았던 부대가 50년대의 군대 모습 그대로였으니 그런 희망을 품을 만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옮긴 부대는 산을 깎아 놓은 황량한 벌판, 그 자체였습니다. 연병장은 개펄이라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고 신식 건물은 골조만 올라갔을 뿐 언제 완공이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허름한 창고에서 칼잠을 청하며 "아이고, 내 팔자야"를 외쳤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만한 경험까지라면 다른 이들도 때때로 겪을 만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부대를 완성해 가는 대부분의 과정은 사병들의 몫으로 돌아왔지만, 혼자만 겪는 일도 아니고 함께 고생하는 부대원들도 있으니 체념하고 아침저녁으로 중노동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힘든 것은 그런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함께 있던 전우들의 입을 빌리자면 '환자급'에 가까운 대대장님의 과도한 애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것은 좋지만 '필요 없는' 이들에게까지 억지로 나누어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덕분에 전 부대원이 주말을 교회에 차압당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주중의 저녁까지도 하나님에게 바쳐져야 했습니다. '통성기도'란 것을 처음 본 것도 군대에서였습니다. 얼마 전 만난 군 후임병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사 닳고 닳은 지금이야 귀신을 봐도 안 놀라지만, 그 당시엔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섰다"고 합니다. 그만큼 통음(通音)이 터져 나오던 밤들은 부대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 기독교 신자와 비신자들 간에 벌어졌던 반목과 질시가 떠오릅니다. 다함께 웃던 전우끼리 고성과 주먹질이 오가던 그 때 일들이. 애초부터 불교신자인 이유로 그 싸움에서 제삼자로 한 발 물러서야 했지만 지켜보는 것이 오히려 더 괴로웠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대해 봐야, 바깥세상 역시 진흙탕이니 미리 경험하라는 대대장님의 깊은 뜻(?)이 아니었나 합니다.
어쨌건 그런 것까지도 그런 대로 참을 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대장님은 기쁨에 날뛰고 사병들은 짙은 한숨을 내뱉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부대 내에 '교회'를 짓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군단에서 약간의 예산을 얻고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결국 어지간한 일들은 사병들의 몫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알았기에 부대원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역시 군 생활을 함께 한 다른 친구는 그때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군 생활하면서 눈앞이 깜깜한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교회공사를 한다는 얘기였고, 다른 한 번은 제대말년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었다"고.
가뜩이나 일과 시간 후까지 각종 공사에 시달리는 처지라 모두 거품을 물었고, 돌아서선 세상의 흉악한(?)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병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일정은 변함없이 착착 진행 됐습니다.
교회 공사 시작 후 밥 배급량이 줄어들기 시작
그런데, 교회 공사가 시작될 즈음 정말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밥이 적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처음 며칠간은 다들 이상하다 하며 고개만 까딱거렸습니다. 그런데 며칠만의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