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0

계화

등록 2005.02.03 17:01수정 2005.02.0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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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습니다! 할아버지!”

계화는 울며 뫼영감과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뫼영감은 얼굴에 노기(怒氣)를 가득히 담은 채 꾸짖었다.


“당장 가지 못하겠느냐! 내 그렇지 않아도 널 버리려고 했거늘!”

뫼영감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계화를 밀쳐버린 채 가버렸다. 계화는 그런 뫼영감의 눈에서 슬쩍 물기를 엿보았기에 그 속을 곧 알아차렸다.

‘이것은 사실 날 위한 일이구나! 내가 철없이 저 분을 불편하게 해선 안 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속이 깊은 계화는 그 길로 궁말을 찾아 갔다. 궁말은 나이가 들어 궁에서 나오게 된 내시와 궁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계화가 찾은 김아지라는 여인도 나이가 들고 자주 몸이 아프기 시작하자 궁에서 나와 생활하고 있는 궁녀였다.

계화는 김아지에게 뫼영감이 적어준 글을 보여주었다. 김아지는 굳은 얼굴로 몇 번이고 뫼영감의 글을 읽었다. 계화는 그런 김아지의 속을 알 수 없어 불안한 눈을 끔벅이며 초조히 기다렸다.


“이 분은 지금 어디 있느냐?”

계화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게 다른 말씀은 없었지만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간 모양입니다.”

김아지는 한숨을 쉬며 넋두리를 내뱉었다.

“세상에 어찌 그런 무심한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까지 알면서......”

김아지는 계화를 목욕시킨 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편히 쉬게 했다. 그리고 며칠 후 궁궐에 갔다 온 김아지는 계화에게 궁궐에 무수리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니 당분간은 궁궐을 드나들며 일을 배우라 일렀다. 계화는 총명해 일을 잘 배워나갔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교서관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계화는 무수리로 6년을 보냈다.

교서관은 많은 책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책의 종류는 대개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계화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는 많지 않았다.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사서와 시경, 서경, 주역의 삼경이 주류를 이루었고 제사 때 쓸 향이 준비되어 있는 게 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화는 교서관 안쪽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책과 목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자문을 온전히 땐 계화였지만 때로는 책의 내용을 알기에 어려움이 있어 모르는 글자는 따로 적어 두었다가 교서관 교리 등에게 슬쩍 물어보기도 했다. 계화가 찾아낸 책 중에 기억이 나는 책이 바로 예전에 본 여진족의 비문에 있는 내용과 비슷한 얘기가 적힌 책이었다. 이 책은 최명길이 보여준 두루마리와도 흡사한 내용이었다.

계화는 자신이 선녀가 버린 아기일지도 모른다는 망상도 했다. 그 후에도 계화는 별 쓸모도 없는 두루마리를 처소 한 쪽에 치워두고 매일 매일 똑같은 교서관 생활을 보내었다.

“난리가 났다! 성상께서 파천을 하신다!”

겨울이 깊어가는 인조 14년 12월 14일, 궁궐은 짐을 싸들고 피난을 준비하는 이들로 어수선해졌다. 이미 한양의 백성들은 청나라 병사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세자와 왕세자비는 먼저 강화도로 출발했다. 궁궐 밖 출입이 가능한 무수리인 계화는 궁말로 가 김아지에게 피난을 갈 것을 재촉했다.

“이미 살 만큼 산 몸인데 피난은 가서 무엇하겠느냐? 허나 넌 아직 젊은 몸, 여기서 시간을 끌지 말고 어서 가거라.”

“저 역시 갈 고향이 없는 몸입니다. 이제 여기가 집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러시면 전 어찌하란 말입니까?”

계화는 끈질기게 김아지를 설득했으나 김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러한 헤어짐은 계화의 운명과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계화는 눈물을 뿌리며 이미 출발한 임금의 어가를 뒤쫓아 피난의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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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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