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이 국민 1%의 문제라고?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을 읽고- 김대중 고문은 국민을 볼모로 잡지 말라

등록 2005.02.14 00:37수정 2005.02.1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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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를 바라보는 두가지 시선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바라보는 데에 절대적인 관점이나 기준은 없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승자의 관점이 강요되기도 한다. 특히 현재의 지위나 입장 그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과거를 보는 관점인 것이다.

[김대중 칼럼] 가해자와 피해자 전문보기

최근 우리는 지난 현대사를 바라보는 두개의 관점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20년 전 민주화운동을 한 자신을 고문한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을 용서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의 얘기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사 논란의 대상을 국민의 1%로 한정 짓고 경제를 위해 과거사 문제를 묻어 두자는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칼럼이 그것이다.

김대중 고문의 과거사 인식

김대중 고문은 정치권 문제의 큰 원인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업(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즉 민주화 세력이었던 현재의 집권 세력이 분풀이 차원에서 과거사 문제에 매몰되어 중요한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김 고문은 피해자였던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피해자, 가해자간의 한풀이와 보복은 필연적인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김대중 고문은 국민의 1%도 안 되는 과거의 가해자, 피해자들이 벌이는 갈등으로 99%의 국민들이 현재의 피해자라는 것을 강조하며, 과거사 문제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과거사 진상규명과 보수기득권의 절박한 위기 의식

필자는 김대중 칼럼을 읽고 난 후 한국 사회의 메인스트림(주류 세력)으로 자부해 온 이들이 느끼는 위기 의식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박정희 이후의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서부터 현재의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수십년간 구축해 온 자신들의 기득 구조가 흔들리게 될 때 기득 세력이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번의 ‘김대중 칼럼’이 아닐까?


‘반민특위’의 해체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 쿠데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친일 부역자와 군부독재세력의 미청산이라는 구조 속에서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성장한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표출되는 이익과 요구에 직면하여 정정당당히 대결하지 않고, 군부정권과 함께 ‘경제우선’ ‘먹고사는 것부터 해결하자’ ‘민주주의는 나중에’라는 구호를 통해 보수기득 헤게모니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민주화 세력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무기는 ‘빨갱이’라는 이데올로기 공격을 통한 근본적인 억압이었다.

친일부역과 군부독재라는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은 보수기득세력은 그들의 이익구조와 헤게모니의 약화를 가져오는 어떤 변화에도 강력한 저항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보수기득층의 저항은 작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으로 나타났다. 보수기득권에게 노무현이라는 인물은 그들의 이익 구조를 해체 또는 약화시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약화시키거나 제거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러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여권에서 추진중인 과거사법에 대한 반발과 국가정보원 ‘7개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과거사 조사 움직임에 대한 반발이 그것이다.

김대중 칼럼은 보수기득세력의 위기감의 반영

김대중 고문은 과거사 문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1%도 안 되는 국민들로 한정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고 고문했던 이들과 당했던 이들이 우리 국민의 1%에 미치지 못 한다는 것이 김 고문의 주장이다. 그러나 국민의 0.1%도 안 되는 독재 세력에 의해 ‘인간답게 살기’를 원했던 99%의 국민들은 국가 강권기관의 폭압과 고문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엄혹한 시대 1%도 안 되는 사람들이 독재와 폭정에 항거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고문과 죽음뿐이었다. 그때 우리 국민은 강요된 침묵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고문의 말처럼 과거 문제는 묻어 두고 경제 발전에 매진하자는 주장은 일본의 과거사 망언을 듣고도 ‘양국의 경제협력과 한국의 무역증진을 위해’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잊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진정 어린 반성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두웠던 우리의 현대사 역시 같은 문제이다.

독재라는 온실에서 따뜻함과 양분으로 성장한 이들이 일반 민중의 희생과 노력에 따른 과실을 제것으로 오로지 하고 과거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우리 대다수 국민들이 그들을 먼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 ‘경제발전’을 핑계로 99%의 국민을 볼모로 잡고 친일과 반민주에 대한 자신의 과오를 덮어 버리려 하는 것은 분명 앞뒤 순서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용서가 선행될 수는 없다.

김근태 장관의 용서는 이근안 전 경감의 사과가 있었기에

2월 10일 김근태 장관은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 전 경감을 찾아갔다.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신을 전기고문, 물고문한 이근안씨를 김근태 장관이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진실이 존재하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복역 중인 이근안 전 경감은 그동안 자신의 잘못에 대한 참회의 뜻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김 장관의 면회 때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이 전 경감의 반성과 참회가 있었기에 김근태 장관이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 두 사람은 과거의 무거운 짐을 벗고 미래를 향해 같이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근태 장관의 이근안 전 경감에 대한 용서처럼 화해와 용서는 쌍방의 이해와 사과 그리고 용서라는 순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어떤 반성도 사과도 안했는데, 과거 사건에 대한 진실도 규명되지 않았는데 용서부터 구하고 과거를 잊어 달라고는 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고문의 주장처럼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시된다면, 우리는 일본과의 무역과 경제협력을 위해 일제 만행에 대한 일본측의 그 어떤 사과도 보상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진실에 바탕한 상호 이해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최대 신문 <조선일보> 지면을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장(場)으로

김대중 고문은 칼럼을 통해 ‘과거사 진상규명’ ‘과거 바로잡기’를 ‘먹고사는 문제 등한시’와 같다는 등식으로 글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국민의 1%도 안 되는 과거사 피해자, 가해자들의 논란 때문에 99%의 국민들이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99% 국민의 침묵이 진정성이 있는 침묵이 아닌 위협과 강요에 따른 침묵이었듯이, 과거사 문제는 단지 국민 1%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문제이며, 우리 모두의 숙제이기도 하다. 김대중 고문이 ‘빨갱이’ ‘간첩’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통한 공격과 같이, 과거사 문제를 ‘그들만의 문제’로 한정지으며 ‘민주화’ 문제를 국민들로부터 분리시키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할말은 한다’는 조선일보의 고문으로 있는 김대중 고문은 한국 최대의 부수를 자랑하는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 ‘진정한 화해와 국민 통합’을 위해 부끄러운 과거와 잘못을 저지른 이들의 반성과 사과 그리고 과거사건의 진실규명에 협조할 것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언론인으로서의 김대중 고문에게 적합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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