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자 한 일간지에 실린 "호주제 폐지는 북한 따라하기" 광고.동아닷컴 PDF
요즘은 종이신문을 잘 읽지 않는데 며칠 전 우연히 들춰보았던 신문에서 재미있는(?) 광고를 봤다.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북한의 가족제도를 따라가는 자들이니 우리 모두 궐기해서 이들을 물리치고 호주제를 사수하자"라는 그야말로 대문짝만한 광고였다.
문구도 좀 그렇고 돈도 많다 싶기도 했지만 사실 그 내용은 그리 놀랄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지난 12월 국회 법사위 주최로 열렸던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개정안 공청회'에서 그 소리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국회 공청회서도 터져나온 '호주제 폐지=공산주의적 발상'
당시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토론을 하러 나왔던 네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이 호주제 폐지는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는 논지의 의견을 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했었다. 그 후 어느 지극히 상식적인 남자들이 모인 토론회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설마하며 믿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소위 우리나라의 메이저급이라는 일간지에까지 그러한 주장의 광고가 실린 것이다. 지난번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가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판정이 나온 후 좀 다급해졌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이 광고에는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이념의 문제가 그대로 녹아 있다.
그들이 그런 광고를 낸 이유는 아마도 더이상 호주제 폐지를 반대할 근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폐지반대론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근거는 호주제 폐지가 우리 사회의 가족해체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주제가 규정하는 가족은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가족과도 다르고 가족은 법률이 아닌 관습이나 문화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반론이 사회적으로 더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의 주장은 더이상 쓸모도 없고 설득적이지도 않다.
상황이 이러하니 더 자극적인 폐지 반대의 근거가 필요했고 북한을 내세운 것이다. 북한에서도 호주제를 폐지했으니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북한 동조론자들이라는 '삼단논법'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호주제가 없는 미국이나 유럽은 모두 북한 동조자들이다. 그야말로 북한과 미국이 사이좋게 만나는 순간이다.
호주제 없는 미국도 북한에 동조?
그런데 보다 중요한 문제는 아직도 이런 논리가 우리 사회에서 일부나마 먹힌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제일 무서운 손가락질은 '너 빨갱이지?'라는 것이다. 요즘처럼 북한을 가깝게 느끼고 금강산 한번 안 갔다온 사람이 없을 정도여도, 빨갱이라는 올가미는 사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덫이다. 그래서 하다하다 댈 근거가 없으면 가장 마지막에 쓰는 비방이 바로 '너 빨갱이지'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그동안 수도 없이 봐왔다. 멀쩡하던 운동권 학생들이 간첩으로 몰렸고, 최근까지 정치권에서도 써먹던 수법이다.
그러니 호주제폐지를 어떻게 하든지 막고 싶은 그들에게 호주제 폐지론자들을 북한 동조론자들로 몰고가는 것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엮을 수만 있으면 아직도 빨갱이라면 치를 떠는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들을 총궐기하게 해서 호주제 폐지를 당장이라도 막을 수 있을텐데'라고 원대한 계획을 짰을 것이다.
보수도 좋고 뉴라이트도 좋다. 어느 사회든 변하자는 개혁파가 있으면 지키자는 보수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옛날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가 이야기했던 보수는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지, 기존의 것을 그대로 끌어안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이다.
왜 그렇게 급하게 바꾸냐는 주장도 나온다. 사연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호주제 폐지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민법이 제정된 1950년대부터다. 또 6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폐지운동이 시작됐다. 즉 50여년간 끊임없이 이야기되어 오고 대안이 제시됐던 사안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