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백은 장판수쪽으로 머리를 낮게 숙였다. 행여나 엿듣는 사람이 있을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성상께서 이곳을 나가 강화도로 옮기시네. 자네가 전하의 뒤를 보호해 주었으면 하네.”
장판수로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성위에서 임금이 초라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욕을 퍼부었던 그였지만 그렇다고 이시백 앞에서 이를 내색할 수도 없었다.
“분부를 받들겠나이다.”
“새벽에 출발하니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사람들을 골라두었으니 후원으로 나가 점검해 보게나.”
장판수가 후원으로 가 보니 복색이 통일 되지 않은 사람들 십 여 명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날래고 힘깨나 쓰는 자들로 뽑은 모양새인데, 들고 있는 병장기들도 각양각색이었다. 장판수는 먼저 큰 도끼를 들고 있는 승군에게 다가갔다.
“이 자리에 중이 무슨 일인가?”
승군은 도끼를 놓고 두 손을 합장하며 공손히 답했다.
“승군 두청이라 하옵니다. 미천한 힘을 더하기 위해 왔나이다.”
장판수는 콧방귀를 끼며 다음 사람에게 다가갔다. 비쩍 마른 몸매에 등에 화살통을 짊어지고 손에 창 하나를 든 사내였다.
“서흔남이오.”
장판수는 역시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기분이 상한 서흔남은 대뜸 쏘아붙였다.
“이보시오 초관! 사람이 통성명을 했는데 그게 무슨 예의요!”
장판수는 서흔남의 눈을 똑바로 보며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누가 지금 통성명을 하자고 했네? 내래 지금 자네들의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나랏님이 이곳을 나가려 하는데 뒤가 불안하니 지켜달라고 하기 위해 모인 것 뿐이라우!”
서흔남은 장판수에게 기가 눌리기 싫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따 말단 초관주제에 대게 으스대는구먼!”
순간 장판수는 품에 지니고 다니는 짧은 환도를 비호같이 꺼내어 서흔남의 목덜미에 가져다 대었다. 그 기세에 서흔남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 할 수 없었다.
“이보라우. 죽고 싶네? 내래 어명을 받든 수어사 나으리의 분부를 수행하고 있는 몸이야. 그러니 내 말이 곧 어명이라우, 알갔네?”
서흔남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살에 닿을 것 같은 환도를 눈동자만으로 내려다보며 입술을 떨었다. 장판수는 꺼낼 때와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환도를 거두고는 축시(丑時 : 밤 1시 이후)에 다시 모일 것을 지시한 후 가버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서흔남은 장판수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입을 열었다. 두청이 그런 서흔남을 위로했다.
“어려운 일이기에 성정을 곱게 쓸 겨를이 없을 터 입니다. 이해하소서. 그나저나 날씨가 궂어질 모양인데 가는 길이 편치 않겠습니다.”
두청의 말대로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날 속였구나!”
청나라 진영에서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첩보를 입수한 마부대가 칼을 뽑아 최명길에게 겨누고 있었다. 최명길은 꼿꼿이 앉은 채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마부대를 바라보며 붓을 들었다.
‘그대들이 군사를 몰아 들어왔으니 성상께서 자리를 피한 것은 당연한 일이외다. 어찌 속였다고 하시오!’
마부대는 더욱 화를 내며 당장이라도 최명길을 베겠다고 했지만 옆에 있던 문관이 이를 만류했다.
“저 자는 조선국왕이 아끼는 신하이자 그나마 우리와 얘기가 통하는 자요. 강화를 위해 우리가 들어온 것인데 여기서 일을 그르치면 황제께서도 진노할 것이외다.”
그 말에 마부대는 칼을 거두며 문관에게 자신의 말을 받아쓰도록 지시했다.
‘가서 너희 국왕에게 우리는 화친하러 온 것이니 왕의 아우와 척화신들을 인질로 내 놓으라 일러라.’
최명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답을 썼다.
‘성으로 들어가 의논 후 다시 오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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