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
한참 별들을 응시하던 권기범은 가만히 윤서를 불렀다.
"응?"
"그곳에도 저런 별들이 있던가?"
"미국 말인가?"
"그래, 아메리카."
"있지 암 있고 말고. 그런데 말일세 신기한 것이 분명 저 별들의 자리는 동일한데 어딘지 모르게 낯선 별들이었네. 참 신기했지. 이국(異國) 땅에서 문물과 제도가 다를 것은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설마하니 밤하늘의 별마저 다른 빛일 줄은 상상도 못했네."
"자네도 그랬나? 나도 구라파, 아니 유럽의 하늘 아래를 떠돌며 수도 없이 조선의 별들을 생각했다네. 반드시 살아서 조선의 별을 보리라. 그리고 다시는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 이국의 밤별을 보는 일이 없게 하리라."
"그래도 기범이 자넨 대단하군. 실은 난 조선 하늘의 별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의심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네. 부끄럽게도 난 조선을 잊은 한 사내로 살고자 마음 먹었었지. 같이 간 동지(同志)들에겐 한마디 내색한 적이 없지만 기실 내 맘 속엔 그런 간사한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네."
"훗, 천하에 홍윤서가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니 놀랄 일이군."
"농(弄)이 아니네. 만민평등과 민주사상이 정착된 모범의 나라에서 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어. 적어도 그 곳은 내가 꿈꾸었던 것들이 모두 구현된 그런 세상이었네. 그래서 미국인이 되어 보겠다고 도착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영어일기를 쓰기 시작했네.
변변한 자전 하나 없이 청국에서 익힌 영어가 바탕이었지만 난삽한 인문 서적을 탐독하면서 철저히 익혔지. 청국에서 나를 주선해 도미(渡美)를 도왔던 개신교 선교사도 라틴 계통의 고급 어휘들이 자유롭게 구사된 내 영어를 칭찬할 지경이었지."
"그건 나도 익히 아네. 왓슨(Watson)이야 기예나 익힌 기능공이니 그렇다 쳐도 다니엘(Danial) 대위조차 자네의 영어에 경탄하는 것을 보면 한치의 거짓도 없음이 자명한 게야."
"어리석게도 난 내가 그들의 언어를 잘 구사하고, 법제를 익히고, 그들의 땅에서 기거하기만 하면 그들과 동일시 되리라 믿었던 것일세."
"그런데 왜 다시 돌아왔나?"
"쳇, 저 놈의 별빛 때문이지."
"........"
"거기에서 보는 별은 조선의 별이 아니었어. 그들에게 난 한낱 동양의 속국에서 온 유색인에 불과했네. 황인종을 멸시하는 백인 불량배에 얻어 맞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네. 연무원 무과 출신인 마두승이와 동행하거나 동지들끼리 무리 짓지 않으면 길거리 행보가 어려울 정도였네. 타지를 다닐 때면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객점 투숙을 거절당해 정거장에서 밤을 지새울 때도 많았고...... 심지어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던 선교사 부부도 응접실 안에 우릴 들여 동석한 일은 없었네. 선교사네 문간방이나 낯선 정거장에서 바라 본 하늘에 저 별들이 박혀 있었지. 지금과는 다른 빛으로......"
홍윤서는 그 때의 암울했던 나날들이 상기되는지 목소리가 잠겼다. 헛기침으로 잠긴 목소리를 풀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결국 난 동양인이고 조선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뭐랄까, 민족(民族)이란 것, 그리고 국가(國家)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계기였다고나 할까? 미국 망명 생활 와중에 벌어진 남북전쟁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3년여를 버티며 신문물과 법제의 습득에 목을 매었던 건, 내 손으로 조선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실함 하나 때문이었네."
"내 다 알지. 자네가 겪은 일, 품은 마음을 내 다 알지."
권기범은 홍윤서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어디 나 하나만 겪었던 고통이겠나."
"무슨 소린가, 나야 본시 험하게 굴러 먹어야 몸이 풀리는 체질인 걸."
"사람~참. 자네 춘부장께서 들으면 서운하시겠네. 3대 독자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난, 미국에서 겪었던 자네의 갈등이 혹 그냥 한 여인의 지아비로 편한 나라에서 안주하고 싶었던 갈등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맞는가?"
"무슨 소리야 이 사람아?"
권기범의 뜬금없는 질문에 홍윤서가 엉뚱하다는 듯 되물었다.
"요즘 자네를 보고 있으면 말이야 자네 누이 연이를 여인으로 느꼈을 때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게 먼 산을 보는 때가 많아지고 어딘지 모르게 아픈 듯 기꺼운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달떠 있을 때가 많고 말야."
"허, 이...... 이 사람. 내가 그렇단 말인가? 이 산중에 마음에 품을 처자가 어디 있다고 내가 그런 병이 들겠나. 사람 싱겁기는......"
"그런데 말일세. 그게 말이지. 자네의 그런 상태가 언제부터인가 하면 말이지......"
"어허, 이 사람아. 자네 말 기다리다 숨 넘어가겠네. 무슨 말이든 하게 이 사람아. 자네와 나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허허허허."
"자네에게서 간혹 느끼는 그 열뜬 표정은 청에서 우리가 만나 귀국하던 때부터 느꼈었다네."
"어헛. 이 사람 그럼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이 병을 앓게 됐단 말인가? 하하하핫. 천하의 홍윤서가 노랑머리의 서양 처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 말씀이군 그래? 하하하하."
어색함을 감추려는지 홍윤서가 짐짓 호기있게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문제이지. 자네 말대로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듣던,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의 홍윤서가 그깟 이국(異國)의 색목(色目) 여인에게 정을 주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자네 일행 중 누군가에게 빼앗겼단 이야긴데......"
홍윤서의 얼굴이 바알갛게 굳어졌다. 분노라기엔 노여운 기운이 부족하고 부끄러움이라기엔 얼굴이 지나치게 굳었다. 어쩌면 묵은 체증이 씻기는 순간의 표정 같기도 했다.
"자네의 일행 중에 여인은 자네 한분밖에 없었어."
권기범은 단숨에 말을 뱉었다.
홍윤서의 얼굴은 더욱 붉어 흑색을 띄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아까보다 풀려 있었다. 차라리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밖으로 발화된 것이 후련하다는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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