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곧 사랑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웨하스 의자>

등록 2005.03.07 14:30수정 2005.03.0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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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담출판사

“약하고 무르지만 반듯한 네모. 그 길쭉한 네모로 나는 의자를 만들었다. 조그맣고 예쁜, 그러나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를. 웨하스 의자는 내게 행복을 상징했다. 눈앞에 있지만, 그리고 의자는 의자인데, 절대 앉을 수 없다.”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와 <반짝반짝 빛나는>으로 알려진 에쿠니 가오리의 새 책 <웨하스 의자>. 이 책은 가벼우면서도 세련된 작가의 문체가 더욱 빛나는 수작(秀作)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아주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진실과 가치 기준을 전하는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을 취한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글은 매우 가볍고 산뜻하다. 독자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독백에 쉽게 빠져들어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 책 <웨하스 의자>의 여 주인공 또한 독자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화가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 스카프나 우산을 디자인하는 주인공.

그녀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그 속에 숨은 매력과 멋이 담겨 있다. 아이 하나를 둔 유부남과 연애를 하지만 그게 결코 외설스럽지 않다는 점도 주인공에게 끌리는 이유이다. 사랑을 하면서도 늘 고독하고, 그와 함께 있을 땐 행복하지만 혼자 있을 때면 싸늘한 절망을 느끼는 주인공.

하지만 사랑과 절망의 교차적 심리 변화를 겪으면서 결국엔 성숙한 자아를 찾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그 과정은 아주 일상적인 삶에 대한 묘사와 명쾌하고 산뜻한 심리 묘사를 통해 전달된다. 독자들은 세련된 언어를 따라가면서 한 여인의 내면 독백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내 여동생-과거의 꼬꼬맹이-도 찾아온다. 모두가 온다. 찾아 왔다가, 돌아간다. 동생은, ‘언니는 언제나 철이 들지, 꼭 어린애 같다니까.’
라느니,
‘언니 너 정말 유별스럽다.’
느니,
‘언니 고독하지.’
라고, 제멋대로 말한다.
물론 나는 고독하다. 그날 병원 앞에서 만난 개만큼이나. 하지만 나는 유별나지도 않고, 더욱이 어린애는 아니다.”


그녀의 독백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과거의 인물들과 현재의 인물들이다. 과거의 인물은 돌아가신 엄마 아빠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 아는 미술가 등이다. 이들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주인공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머무른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고 이야기한다.


현재의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은 애인과 동생이다. 애인은 가끔 절망에 빠지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반자이다. 하지만 그 또한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에 여주인공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깊은 절망과 고독감을 수반하는 일이 아니던가.

주인공은 절망과 행복 사이를 오고가며 사소한 일상 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녀의 불안감이 증폭되는 이유는 자신의 사랑이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앉으면 부서져 버리는 웨하스 의자처럼 행복은 언제나 그녀의 것이 아닌듯한 불안감. 그 불안감은 알 수 없는 느낌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녀들은 어쩌면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돈 많은 남편이 있었거나, 젊은 애인이 있었거나, 자랑 삼을 아이가 있었거나, 그래서 그녀들 모두가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 엄마가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도.”

이처럼 덜 성숙된 듯한 주인공의 목소리는 독자로 하여금 이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동정을 하도록 만든다. ‘아, 그녀는 혼자여서 외롭구나. 사랑해서 행복할 때도 있구나. 혹은 불행하고 또 가끔은 행복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독자들은 자신의 상황과 그녀의 상황을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모든 이들의 삶이 이와 같은 행복과 불행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너무나 좋아했던 캐러멜 한 상자. 어린 시절에는 이처럼 아주 단순한 것에도 만족하고 행복했으나 현재는 그렇지 못한 주인공.

“그 캐러멜. 한 상자만 있어도, 그저 단순히 행복했다. 앞일은 너무 허황해서, 걱정도 되지 않았다. 동생은 갓난아기였고, 옆에 애인은 없었다. 그래서 캐러멜이 있으면 좋았다. 그때 캐러멜은, 정말 나의 것이었다.”

주인공의 독백처럼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일들에 휘말려 산다. 그것이 단순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캐러멜 한 상자를 가진 행복한 어린이로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작가는 주인공을 깊은 절망에서 끌어내어 행복 속에 남겨 둔다. 그 결말의 의미가 곧 우리가 찾고 있는 인생의 의미일 것이다. 사랑은 곧 절망이고 절망은 곧 사랑이다. 그리고 또 그 안에 행복도 존재하고 불행도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찾는 일은 자신의 몫일 것이다. 절망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주인공처럼….

웨하스 의자

,
소담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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