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학문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서평] 다산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등록 2005.03.07 16:38수정 2005.03.0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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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글은 본래 인간의 내면이나 정리를 매우 절실하게 드러내는 형식이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은 일이겠으나, 더러는 그것이 여의치 못한 경우도 있는 법. 이 경우에 서한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인 셈이다. 현대의 신속한 삶과 과학기술문명은 그런 가능성마저도 호사가의 취미로 만들어버렸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위당 정인보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칭송하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서간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여러모로 어제와 오늘을 반추하도록 한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쓰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어구가 온전하게 빛을 발하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옛것을 돌이켜 오늘을 일깨움은 얼마나 흐뭇하며 유의미한 노릇인가!


두 아들과 둘째 형님 약전, 그리고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글 모음집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서책은 역자 박석무의 말처럼 다산에게 다가서는 입문서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1979년 초간본 서문에서 역자는 서책의 출간에 즈음하여 자신의 바람 하나를 피력한다.

"근래 학계의 노력으로 다산학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많이 되어가고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다산의 유배지 서한문에 보인 그의 철학사상, 인간적 고민, 아버지로서의 자식에 대한 애정 등이 다산을 이해하는 입문 자료로 역할을 했으면 하는 것도 역자의 욕심이다." (13쪽)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내가 특히 유의하여 읽고 마음에 새긴 대목은 학문과 관련된 글들이다. 다산 선생은 도처에서 조선후기 사회가 직면하고 있던 학문의 낙후와 과거제도의 폐해를 통렬하게 지적한다. 이런 지적은 비단 조선사회의 문제를 적시하는 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학문경향을 두 아들에게 일깨우는 글에서도 산견된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하였다. 그 후 중국의 절강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보아 관리를 뽑는 잘못된 제도가 없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101쪽)

일본과 중국의 명유들이 정밀하게 학문을 연구한 결과를 기술하면서 다산은 학문하는 기본자세를 벼슬살이와 거리두기나(112쪽), 곤궁한 생활형편에서(113쪽) 보고 있다. 이런 자세는 과거를 통해 세상과 임금을 만났던 정암 조광조나 퇴계 이황과 연결되면서 변증법적으로 진척된다. 국법이 준엄하니 그것을 따르되 제대로 된 경전공부를 하라고 선생은 강조하는 것이다(295쪽).


다른 한편으로 다산은 학문하는 근본적인 동기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금수를 구분하는 잣대가 독서에 있음을 갈파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자 공재 윤두서의 현손이며, 다산의 18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윤종문에게 당부하는 글을 보자.

"독서 한 가지 일만은 위로는 성현을 뒤따라가 짝할 수 있고, 아래로는 수많은 백성들을 깊이 깨우칠 수 있으며, 어두운 면에서는 귀신의 정상을 통달하고, 밝은 면에서는 왕도와 패도의 정책을 도울 수 있어 짐승과 벌레의 부류에서 초월하여 큰 우주도 지탱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인 것이다."(257쪽)


끊임없는 독서를 통하여 깨우친 바를 다시 서책으로 펴낼 때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다산은 상세하게 일깨운다. 실학자 다산이 사유하는 저서의 순서는 경전에 대한 저서가 최우선이며, 그 다음이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책이며, 국방과 대소기구에 대한 분야도 중시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웃음이나, 진부한 논의들의 저서는 일소에 부치고 있다.

이런 바탕 위에서 다산은 저서출간의 의미를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서이다"(150쪽)고 밝힌다. 이 문구를 세간의 명리를 좇는 허랑방탕한 자세라고 비난함은 사뭇 그릇된 것이다. 학문에 몰두하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노력하여 얻어낸 성과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읽히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실학자인 다산 선생의 학문적인 입장을 명쾌하게 드러내는 대목은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 선생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두 가지 학문을 겸해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나는 속학(俗學)이요, 하나는 아학(雅學)입니다. 이는 후세의 악부(樂府)에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곳 아이들은 아(雅)만 알고서 속(俗)을 알지 못하므로 오히려 아를 속으로 여겨버리는 폐단이 있게 되었습니다."(201쪽)

아와 속 가운데 '아'만을 취하는 과거제도나 거기에 탐닉하는 무리들을 경계하는 자세가 보이거니와,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함으로써 '속'에만 깊이 빠져든 무리들 모두를 한꺼번에 징치하는 입장이라 할 것이다. 경전연구가 세상살이와 병행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실사구시의 자세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선생의 자태가 약여하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이런 고풍스러운 내용만을 담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오랜 유배생활로 연유된 각박한 인심과 신세한탄, 가족들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 네 살배기 막내아들의 죽음을 접한 아버지의 절절한 정한, 공부에 뜻을 두지 아니하는 두 아들에 대한 준절한 꾸중과 같은 매우 개인적이며 가족적인 인간 다산의 면모가 생생하게 숨쉬고 있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짐승고기를 먹지 못하여 건강을 잃어가는 둘째 형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개고기를 삶아먹는 법'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이글은 형제간의 도타운 정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으로써 개를 포획하고 끓이는 방도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밖에도 가난과 곤궁을 물리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책과 농사짓는 법, 물감을 들이는 법, 노동에 부여된 의미와 가치, 물질에 대한 과도한 숭상을 경계하는 등의 글월을 통하여 다산 정약용은 당대의 위대한 실학자이되 현대의 참된 스승으로서 그 빛을 찬란하게 내뿜고 있는 것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는 세 편의 역자서문이 들어 있다. 1979년 초간본 서문과 1991년개역-증보판 서문, 그리고 2001년 증보판 서문이 그것이다. 20여년 거리를 두고 세 차례에 걸쳐 출간된 이 서책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대면하였다. 박정희 유신독재 말기에 시작하여 폭력적인 노태우 정권시기를 거쳐 국민의 정부를 자임한 김대중 정권시기와 만났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독자들은 이 서책이 지나온 시기를 생각하면서 다산 선생의 깊은 흉중에서 우러나오는 심사원려와 우국충정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그와 아울러 아주 작은 일상사에까지 사유와 인식의 영역을 확대한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우리의 옷깃을 여미도록 한다. 170여 년 전에 세상과 작별한 선생의 명복을 빌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창작과 비평사, 2003년.

덧붙이는 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창작과 비평사, 2003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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