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이 가르침을 준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

유씨 할아버지는 머리를 쓰지 않고 몸으로 가슴으로 말합니다

등록 2005.03.08 10:52수정 2005.03.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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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처자식들 생각은 다르지, 자네는 편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좋겠나."


우리가 적은 돈벌이로, 별로 가진 것 없이 시골에 사는 것을 두고 종종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들은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가진 것 없는 부모 때문에 앞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내가 시골에서 적게 벌어먹고 사는 것이 처자식들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 선배에게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선배는 나름대로 내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가르침을 주었지만 듣는 나는 썩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속내도 잘 모르면서 단지 돈벌이를 시원찮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처자식 고생시킨다고 말한다면 화가 안 나겠습니까?

그냥 선배의 애정 어린 충고로 가볍게 넘어갈 말이었지만 그 선배는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산에서 생활하는 아빠와 늘 떨어져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식구는 분명 그 선배네 가족들 보다 덜 먹고 덜 입고 삽니다. 그들의 아파트보다 허름한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그 선배와는 달리 단 한 평의 땅도 없습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어도 가족과 함께 살아갑니다. 나는 그 선배에게 돈벌이하는 시간을 줄여 가족들과 오순도순 사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겠냐며 불만 가득한 투로 말했습니다.

"나는 처자식을 도시에 두고 산에 들어가 도 닦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가네요."


그는 후배의 '싸가지 없는 말'을 잘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할 때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더듬거리고 있었지만 그 선배는 감정 변화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 선배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는 '마음 수련'에 대해 흔히 말하는 '일류 대학' 에서 강의를 할 정도로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계속됐습니다.


"최소한 평균 수입은 되어야지, 평균 수입에서 약간 못 미치는 생활수준이던지."

얼핏 듣기에는 당연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더함도 모자함도 없는 중용을 강조하려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용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평균 수입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될 수 있을 터이니까요.

그에게는 내가 감정에 못 이겨 막말을 해대는 후배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수행이 덜되 먹은 놈으로 여길 것입니다. 큰 뜻을 품고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이런저런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 그 선배는 내가 적게 벌어 행복하게 산다는 핑계로 빈둥빈둥 거리며 텃밭이나 일구는 보잘 것 없는 놈으로 비춰 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올해 일류대학에 입학한 몇몇 후배들의 자식들을 열거하더니 나를 내려다보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걸 부모가 뒷받침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아이에게 괴로운 것이지. 우리 아들놈이 이번에 학원을 보내 달라고 하더구먼, 녀석이 명문대학에 가고 싶다고."

그 선배의 아들은 이번에 고등학교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밤 10시 30분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선배는 그런 자식이 대견해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 아이가 어딘가 모르게 측은해 보였습니다.

"근디유, 그건 아이들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 문제라고 보는디유, 애들이 자발적으로 학원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집에서 부모들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고, 그런 경쟁심을 갖도록 알게 모르게 교육시켰기 때문이 아닐까유?"

물론 일류대학을 가기 위해 자청해서 학원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경쟁심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학문'을 깨우치고자 학원에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 집 애들이 학원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선배 말대로 부모의 돈벌이가 시원찮아 학원에 가질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선배의 아들처럼 좀더 크면 또 모르겠지요. 우리 아이들도 일류대학에 가고 싶으니 학원을 보내 달라고 할런지도 모릅니다.

본래 속 좁은 나는 도사라 불리는 그 선배의 변화 없는 그 느긋한 표정과 어투에 좀처럼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물었습니다. 혹시나 우리 식구들이 시골생활에 고통스러워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먼저 아이들에게 직설법으로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아빠하고 떨어져 살면서 도시에서 너희들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이나 실컷 하며 사는 게 좋냐, 아니면 이렇게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시골에서 사는 게 좋냐."
"여기가 좋지, 당연히 아빠하고 다 같이 사는 게 좋지."


묻는 내가 바보였습니다. 아내에게도 물었는데 아내는 '당신도 참 어리석다'는 표정으로 따질 가치도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화 날 게 뭐가 있어, 그 사람은 그 사람 방식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사는 건데, 그냥 무시해 버려, 그 선배는 이것저것 벌이는 사업이 많잖아."
"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업이라지만 마음이 급해진 것이지, 뭔가 한꺼번에 이루려고 하는, 그래서 내가 적게 벌어먹고 사는 것이 답답하게 보였을 테고."


비록 한 달에 60, 70만원의 생활비로 살아왔지만 그동안 돈이 없어 남한테 단 한번도 손 내민 적 없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배고파 죽겠으니 먹고 싶은 거 사 달라고 졸라 본 적이 없고 좋은 옷, 새 신발 사달라고 칭얼거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입는 것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나는 좀 더 큰 뜻을 품고 살아가라는 그 도사 선배의 가르침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주 사소한 면에 흥분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상 모든 인연들 중에 하물며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주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 역시 말과 행동이 달랐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생각되는 선배에 대해 화를 냈던 나 역시 언행불일치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집 옆 산 아래 버려진 밭에 호박이나 옥수수라도 심어 볼 요량으로 쥐불을 놓고 있는데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께서 지게를 지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지게 작대기에 의지해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올라 갈 때와 똑같은 자세로 느릿느릿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한 수 배워야 할 선생은 사회적으로 덕망 있는 그 선배가 아니었습니다.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선배는 내게 단지 말로 가르침을 주려 했지만 유씨 할아버지는 내게 말없는 가르침을 주고 있었습니다.

내가 느릿느릿 살고 있다지만 유씨 할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늘 허둥대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빈 지게로 산을 오를 때는 가벼운 걸음이지만 내려 올 때는 종종 숨을 헐떡입니다. 지게를 지고 나가면 보통 하루 이틀 치 땔감을 해오는데 욕심 부려 한꺼번에 사나흘 치를 해오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 지게를 지고 산을 내려오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가슴이 막힐 정도로 숨이 찹니다. 지게 무게에 짓 눌려 목 뒤가 뻐근해집니다.

지게질이 그렇듯이 유씨 할아버지는 농사일에도 고수입니다. 일을 할 때 보면 태극권의 고수들처럼 느릿느릿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한 호흡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밭을 일굴 때 보면 무척 힘들어 보입니다. 저렇게 굼떠서 저 밭을 언제 다 갈 수 있겠는가 싶게 느리게 일하지만 딴전을 피우다가 다시 보면 어느새 다 갈아 놓았습니다. 어쩌다 수틀리면 온 동네가 시끄럽도록 소리소리 내지르지만 누군가를 내리깔고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유씨 할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면 그만큼 되돌려 줍니다. 머리를 쓰지 않고 몸으로 가슴으로 말합니다. 편지글을 대신 읽어 줘야 할 만큼 배운 것은 없지만 머리를 굴려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않습니다. 입으로 먹고살지 않고 몸으로 먹고삽니다. 그저 느릿느릿 성질 급한 사람이 보면 속 터질 만큼 느리게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 소를 기르는 집은 유씨 할아버지네 집 밖에 없을 정도로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하십니다.

그렇게 부지런하지만 가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유씨 할아버지의 평생 재산은 외양간의 소들과 논 서너 마지기가 전부입니다. 욕심 많은 사람들이 본다면 참 미련스럽다고 할 것입니다. 평생 쉬지 않고 머슴처럼 일했는데 그 대가가 땅 서너 마지기라니, 답답할 노릇일 것입니다.

유씨 할아버지는 자투리 땅 하나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먹을거리가 들어갈 자리라도 생기면 무언가를 심습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로 땅값이 오르니 마느니 시끌벅적해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농사지을 땅에 대한 욕심은 많아 보이지만 땅을 사고파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유씨 할아버지는 그 도사 선배처럼 머리 좋은 사람들 모아 놓고 강의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도사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늘과 땅에 의지해 살아가는 유씨 할아버지 같은 분이야말로 진짜 존경받아야 할 '도사'라고 생각합니다.

가진 것 별로 없고
편지 글 조차 읽을 줄 모르는 유씨 할아버지,
어제도 오늘도 소처럼 느릿느릿 일을 합니다.
지게 지고 산에 오를 때도 어기적어기적
한 짐 땔나무를 가득 싣고
지게 작대기에 의지해
산을 내려올 때도 어기적어기적
올라갈 때와 똑같은 자세입니다.
하늘과 땅에 의지해 살아가는 유씨 할아버지,
성질 급한 사람 속 터질 만큼 느리지만
우리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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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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