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호랑이가 울다
“우리가 이기고 돌아왔다! 우리가 이겼다!”
잠잠했던 남한산성에 한바탕 환호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북문대장 원두표가 새벽에 병사를 이끌고 청군 진지를 급습해 아무런 피해 없이 수십 명을 해치우고 6두의 수급을 베어 오는 성과를 올린 것이었다. 모두가 고무된 분위기였지만 서문대장 이시백 휘하의 병사들은 엄히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런 일이야 식은 죽 먹기지. 나가서 오랑캐놈들 몇 명 해치운다 해도 분이 반은 풀리겠지만 결국 크게 이겨서 전부 쫓아낸 것은 아니잖네?”
장판수는 허공에 칼을 훡훡 휘둘러보며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홀로 중얼 거렸다. 말은 그렇다 해도 장판수는 성 밖을 나가 적을 칠 계획이 없는 이시백에 대해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긴 했다. 원두표의 첫 출전에 고무된 남문대장 구굉과 동문대장 신경진도 곧 군사를 내어 오랑캐를 친다는 소문이 성내에 돌았다. 평소 장판수에게 격검을 배우던 군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초관요!”
장판수의 휘하에 있는 땅딸막한 병사 하나가 나섰다. 그는 본명보다는 ‘시루떡’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널찍하고도 검은 얼굴 모양새와 어디서나 노래 가락처럼 말을 엮어내는 품새가 시루떡처럼 맛깔스러워 보인다는 이유로 붙여진 별명이었다.
“칼만 들면 뭣하리오? 다른 곳은 동분서주, 오랑캐를 어찌하면 무찌를까 궁리인데 우리 초영 뒷짐 지고 성가퀴만 이리저리, 지겨워서 못 살것소!”
“이놈아, 살기 지겨우면 칼 하나 들고 오랑캐 진지로 뛰어 들면 될 거 아니네!”
장판수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씨근덕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시루떡은 장판수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채고서는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서문대장 이수어사, 그 휘하의 장졸들은 조선천지 용맹으론 으뜸이라. 그 중에서 장초관을 으뜸용사 여기시니 나아가서 말하시면 다시 생각 안하겠소?”
“내래 말씀은 드려보았다!”
원두표가 적의 수급을 베어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판수는 아침나절부터 이시백을 찾아달려 갔다. 이시백은 이서와 함께 무엇인가 얘기를 나누다가 들이닥치듯이 달려온 장판수를 보고서는 급히 말문을 닫는 모양새였다.
“나으리! 저희도 출정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이시백은 평소 그답지 않게 대뜸 호통부터 쳤다.
“내 이놈! 총융사께서도 와 계신 마당에 이게 무슨 결례인가! 내 별도의 명이 있지 않는 한 본분에 충실하라 이른 터인데 무슨 출정을 허락하란 말인가!”
장판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서 가버렸고 이시백은 이서와 못 다한 말들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그 곳에 뭔가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흥미롭기는 하나 막막한 얘기올시다.”
이서는 한참을 세차게 기침을 한 후에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이서는 근래 들어 더욱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나 역시 이러한 말을 하기에 앞서 걱정이 앞섰네. 늙은이의 노망이라도 여겨도 좋으나 내가 보기에 조정대신들은 누구도 믿을 수가 없으며, 각 문의 대장도 자네를 빼고서는 믿을 수가 없네. 자네는 주위의 일에 동요되지 말고 오로지 성상폐하와 자신만을 믿으며 주위를 지켜보아야 하네”
장판수가 자리를 비키는 찰나에 본의 아니게 밖에서 엿들은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시백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결코 아침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장판수에게 판단되었기에 지금으로서는 이를 따르는 것이 옳을 터였다. 다만 장판수가 답답해하는 것은 이서가 하는 말을 따져 보았을 때 진짜 적은 밖에 있는 오랑캐가 아니라 남한산성 내에 있는 대신들일 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국난의 상황에서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임을 느낀 것이었다.
‘하기야 내래 갑사나부랭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여태껏 제대로 된 게 있었갔어!’
장판수는 다시 검을 뽑아든 채 이를 악다물고 칼춤을 추어대었고 병졸들은 그런 장판수를 보며 슬금슬금 흩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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