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고삐 풀린 망아지 같네요”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91) 안흥 나들이

등록 2005.03.09 09:11수정 2005.03.0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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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봄의 길목, 강이 풀리고 강가의 나무들도 싹을 트게 하려고 잔뜩 물을 머금고 있다.

봄의 길목, 강이 풀리고 강가의 나무들도 싹을 트게 하려고 잔뜩 물을 머금고 있다. ⓒ 박도

봄의 길목


안흥을 떠나온 지 보름이 지났다. 날마다 눈만 뜨면 바라보는 산과 들판과 시내, 벌써 그 산하가 그립다. 아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의사가 가능하면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안흥 나들이를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하고 지내던 터에 하나의 언턱거리가 생겼다.

마침 어제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마무리 교정쇄를 출판사로 넘겼다. 그런데 본문에 들어가는 수백 장의 사진 가운데 두 장면을 <오마이뉴스>에서 다운받아서 썼더니, 다른 사진보다 선명도가 훨씬 떨어져 출판사 편집자도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난번 아내가 안흥에 내려갈 때 부탁했으나 찾아오지를 못하였다. 아무래도 내가 안흥에 내려가서 필름을 찾아 바꿔 넣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임도 보고 뽕도 딴다'는 말처럼 사진도 찾고 안흥 산골마을도 둘러볼 겸 아내에게 넌지시 부탁했다 그러자 아내도 마침 내일이 할머니 제사인데, 향로도 촛대도 모두 안흥 집에 있기에 가지고 와야 된다고 하여, 우리 내외는 일거삼득의 일을 하고자 안흥으로 출발했다. 카메라까지 들고 나서자 자기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욕심을 부린다고 아내가 한 마디 한다. 그러나 어찌 내 열정을 꺾을 수 있겠는가.

a 팔당호 상류 나루터에 보트는 아직도 겨울잠을 자고 있다

팔당호 상류 나루터에 보트는 아직도 겨울잠을 자고 있다 ⓒ 박도

오늘도 늘 다니던 국도를 탔다. 남양주를 지나 덕소 양평에 이르자 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간밤 뉴스에 황사가 온다더니 그런 탓인지 시야가 흐렸다.

경칩도 이미 지나고 곧 춘분을 앞둔 때인지라 봄기운 물씬한 강마을이었다. 하지만 팔당호 상류에는 이제야 지난 겨울에 온통 강을 뒤덮었던 얼음이 천천히 녹고 있었다. 빈 나루터에는 보트의 모터가 여태 비닐주머니를 뒤집고 긴 겨울잠에 빠져 있었다.


조금 더 달리자 농사꾼들이 논두렁 밭두렁을 태운다고 연기가 피워 올랐다. 저렇게 태워줘야 올 농사 병충해 피해를 조금이라도 예방할 수 있는데 이 불씨가 잘못 번져서 산불이 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사람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될 일이리라.

a 따사한 봄볕에 잔설이 잦아지고 있다. 팔당 상류 양평

따사한 봄볕에 잔설이 잦아지고 있다. 팔당 상류 양평 ⓒ 박도


a 농사꾼들이 오는 봄에 농사를 준비하고자 논두렁 밭두렁을 태우고 있다

농사꾼들이 오는 봄에 농사를 준비하고자 논두렁 밭두렁을 태우고 있다 ⓒ 박도

주인을 잃은 썰렁한 집


아직은 쌀랑한 봄바람을 맞으며 6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에 이어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에 이른다. 거기서부터는 강원도로 갑자기 산세도 달라지고, 공기도 한결 상큼하다. 햇볕이 미치지 않는 산기슭에는 여태 눈이 쌓였다.

a 매화산 전재 산기슭에 남은 눈

매화산 전재 산기슭에 남은 눈 ⓒ 박도

30여 분 더 달리면 새말나들목이 나오고 다시 동북으로 더 달리면 안흥으로 넘어가는 매화산 전재에 이른다. 고개가 무척 높다. 옛날에는 이 고갯마루에 소장수를 노린 산도둑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소를 몰고 다니는 소장수는커녕 걸어서 고개를 넘는 사람도 없다. 이 고개를 넘으면 안흥이다.

전재를 넘어 조금 달리자 도로가에는 ‘찐빵의 고장’답게 벌써 찐빵 집들이 하나 둘 눈에 띈다. 곧 집에 이르렀다. 주인을 잃은 집 마당에는 눈이 그대로 남은 채 썰렁하기 그지없다.

수도꼭지를 틀었으나 여태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이 강원 산골마을에는 봄이 좀 더 무르익어야 언 땅이 완전히 녹아서 얼었던 수도관이 ‘뻥’ 뚫릴 모양이다.

다행히 잔뜩 쌓인 필름 뭉치에서 두 장면을 찾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출판사 편집자에게 알렸더니 이제는 모든 자료가 완벽하다고 함께 좋아했다. 한 문장 한 낱말로,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저자와 편집자는 최선을 다하는 게 프로 정신이 아닐까?

a 주인을 잃은 썰렁한 내 집

주인을 잃은 썰렁한 내 집 ⓒ 박도

곰곰 생각해 보니 나의 안흥 생활의 보람은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라는 기사와 책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안흥을 찾았으리라. 찾은 필름을 안주머니(가슴)에 넣고서 다시 집을 나섰다. 만나는 안흥 사람마다 내 안부를 물었다.

우편물을 찾고자 우체국에 들르고 오랜만에 찐빵을 먹고자 가게에 들렀더니 가는 곳마다 모두 안부를 물었다. 자그마한 동네다 보니 소문이 다 난 모양이다. 하기는 <오마이뉴스> 기사로 나가자 미국의 동포까지 안부 인사를 전해왔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좀 조용히 살라고 충고한다

곧 전재를 넘어 새말에서 늦은 요기로 막국수를 먹고 서울로 달렸다. 이달 말쯤 깁스를 풀 수 있다니 아마도 다음달에는 다시 안흥으로 내려갈 것이다.

“꼭 고삐 풀린 망아지 같네요”

목다리를 짚고 절뚝거리면서도 카메라로 여기저기를 담고, 걸핏하면 차를 세우는 남편에게 던지는 아내의 촌평이었다. 나는 여태 철이 덜든, 꿈을 먹고 사는 소년인가 보다.

a 오원리에서 바라본 가물가물한 전재

오원리에서 바라본 가물가물한 전재 ⓒ 박도


a 예나 지금이나 한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팔당 상류, 경기도 양평

예나 지금이나 한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팔당 상류, 경기도 양평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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