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게 채색해낸 우리의 아픈 근대사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1998년)

등록 2005.03.09 14:07수정 2005.03.1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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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 정아은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일제 강점기 전후 한국인의 생활상.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이 땅에서 태어나 생활했던 한 조선 어린아이의 생활을 해방 후 분단된 나라 남쪽에서 살고 있는 내가 읽는다.

잔잔한 어조로 전개되는 이 책에 나오는 일제 강점기 전후 우리 민중의 생활상은 한국인인 내게도 생소하게 다가왔다. 개화와 일제침략이라는 굵직굵직한 역사에 직면해야 했던 순박한 농부들. 엄한 유교사상과 임금님에 대한 순박한 충성심으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의 생활에 청천벽력처럼 다가온 서양의 신문물들.


이미 서양화된 문물이 정착된 이후에 태어나 자라온 내게는 신문물보다는 과거 유교 생활상들이 더 생소하게 느껴졌고 이 생활상과 신문물-지금은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는-이 충돌하는 장면들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나 또한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고 열광했던 독일인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담고 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든, 나라가 다른 나라에 점령당하든 그것은 지배층의 이야기일 뿐이다. 민중들은 나라에 어떤 외형적인 변화가 일어나도 이제껏 지내온 생활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저 이제껏 배워왔던 대로 열심히 농사짓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인간의 도리를 다하면 500년간의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다시 어디선가 훌륭한 임금님이 출현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어갈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외형상의 변화는 순식간에 거센 물살을 타고 이들의 생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다. 신식학교, 일인들의 출현, 토지 몰수, 걸핏하면 총질을 해대는 일본 순사들, 무너져내리는 반상제도와 충효사상.

'개화'와 '일제강점'이라는 두 커다란 태풍을 한꺼번에 맞게 되는 한국의 농촌 사회는 처참하게 해체되어 간다. 키우던 거북이가 실종되었다고 온 가족이 함께 하루 종일 마을을 뒤질 정도로 순수한 정서를 가진 이들에게, 마을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이 일본 순사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총에 맞거나 하루 아침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을 다리를 건설한답시고 일본인에게 뺏기거나, 의학발전을 위해 죽은 자의 시체를 함부로 해부하는 일 등은 감당하기 어렵다.


확연히 다른 문화가 갑자기 물밀 듯 밀려오고,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충격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족 구성원에 따라 제각각이다. 생의 대부분을 유교의 영향으로 수동적이고 희생적인 역할을 하며 살아온 어머니는 새로운 문물들에 대해 확고한 거부감을 보인다. 같은 유교생활권에서 살았지만 주체적인 자세에 서 있고 '배움'의 기회가 있었던 아버지가 새로운 문물을 배워야 살아갈 수 있음을 자각하고 아들에게 신식학교를 가라고 권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일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유로 신식학교에 들어가긴 하지만 어머니의 제지로 학교를 그만두기도 한다. 어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유교 신념에 따라 신식학교를 그만두지만 사회가 점점 신 문물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아들은 기존 윤리에서 조금도 벗어날 줄 모르는 어머니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어 묵직하게 무게감을 더해오고 있음을 깨닫고 괴로워하다가 결국엔 도망가고 만다.

결국 어머니로 대표되는 구시대 윤리와 신식학교로 대표되는 신문물사이의 갈등이 '도망치는 아들'이라는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마는 것이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에 못난 모습으로 못 박힐 수밖에 없는 어머니, 이러한 어머니에게 경멸감과 원망을 느끼는 아들. 이 모든 것은 시대의 산물이었으며 아들의 원망은 사실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보다는 그러한 가치관의 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불안정한 시대를 향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잔잔한 소설이 내포하고 있는 건 신-구 갈등만이 아니다. 동양에서 도망쳐 나온 소년이 독일에서 성장해가며 만나게 되는 서양의 문화. 동서양의 대면이 이 소년의 존재 자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소년은 자연과 어우러져 순하게 살았던 자신의 평화로운 어린시절을 항상 그리워하면서도, 뚜렷한 반상과 남존여비 사상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한국전통 문화의 잔인성과 만민평등사상과 합리성이 이미 체계를 갖추고 있는 서양문화를 비교하며 끊임없이 열등감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아시아의, 아니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지구상의 나머지 모든 약소국 국민들이 매순간 느끼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과 문화적 열등감의 초기 단계인 것이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소리에는 화려한 아름다움이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반면 가야금이나 대금 소리는 잔잔하고 단아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하는 힘이 있다.

이미륵의 소설은 후자에 가깝다. 이렇게 단아한 어조로 그 시대의 혼란상이나 인물의 마음에 오갔을 고통을 묘사했다는 것은 거의 아이러니에 가까운 일이다. 이 소설이 "동양적인 미를 기계중심의 서구문명에 주입시켰다"는 찬사를 받은 것도 소설의 내용보다는 이러한 어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미륵은 동양의 문화가 우월하다거나 서양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시선으로 순수하게 들여다본 동서양의 생활상을 인본적인 관점에서 맑게 묘사해낸 것이다. 그리고 어느 문화에 가든지 인간의 본성에 흐르고 있는 여리지만 끈끈한 '박애' 정신을 작품 전편에 물 흐르듯이 깔아 놓고 있다.

1900년대 전반기에 대해서 그려놓은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몇 편 소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모두 일제 치하에서 쓰였기 때문에 시대상황에 대해서 모호하게 그리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그리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 식민지라는 비정상적인 상황 하에서 문인들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소년기 이후를 서양문화권인 독일에서 보낸 이미륵이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한국 민중의 생활상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언젠가 일본의 문학사를 읽다가 1920-30년대 일본근대문학의 전성기를 맞아 문학계에 전집 출판이 붐을 이루었다는 단락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이 부분을 보고 조금 의아했다. 어떻게 1920년대에 출판계가 발전할 수가 있지? 그 시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때인데. 이 시기에 도대체 어떤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무릎을 쳤다. 아, 이것은 일본 이야기구나. 일본은 이 시기에 식민지가 아니었지. 그러니 문학이 발전할 수도, 출판계가 전성기를 이룰 수도 있었겠구나.

이처럼 내 뇌리에서 그 시기는 일제에 점령당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불모의 시기, 암흑기로 확고히 자리매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도 평범한 서민들의 삶은 계속 이어졌고 순박하고 성실한 한국인의 기질은 면면히 이어져갔다. 이미륵의 소설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삶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이미륵이 조금 더 오래 살아서 조국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 그 이후 분단국가 양쪽에서 이루어지는 군사독재와 신왕조설립을 보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만일 한국으로 돌아와 남북한 어느 한 곳에 정착하여 살았다면 이 무시무시한 현대사 또한 '압록강은 흐른다'처럼 아름답게 묘사해낼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가 세상을 빨리 등지게 되어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잔인한 전쟁이라는 6·25를 보지 않은 것은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은 지금, 숨죽인 채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과 독일에 간 지 6개월이 지난 어느날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전해듣는 소년의 망연자실한 모습, 4년이 지나도록 독일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괴로워하는 대학생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또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분단과 전쟁, 군사독재라는 이글거리는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우리 민족의 아픈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압록강은 흐른다 - 상

이미륵 지음, 윤문영 그림,
다림,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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